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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Restart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10,646자
24시, 혹은 0시. 초침 한 번으로 서로 다른 시간과 날짜가 공존하고 변하는 시간. 시계처럼 아카네의 핸드폰이 12번 울렸다. 11월 29일. 그의 생일을 맞아 축하의 말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걸 알림 삼아 깨어나듯 책에서 눈을 뗀 아카네가 슬며시 웃었다. 월말에 가깝다 보니 쌓여가는 생일 메시지를 보다 보면 올해도 괜찮게 보냈다는 감상이 들었다. 아카네는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스마트폰을 챙겨 침대로 향했다. 형광등은 끄고, 협탁에 올려둔 향초에 불을 붙였다. 빛과 함께 피어오르는 향을 즐기며 침대에 앉아 아카네는 뒤늦게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동기, 고향 친구, 가족… 역순으로 쌓여있는 이름들을 쭉 내리던 엄지손가락이 일순 멈추었다. 타키온. 자신의 담당 우마무스메. 제일 먼저 연락을 해줬구나. 아카네는 아무도 보지 않건만 히죽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아카네 군, 일어나는 대로 곧장 연구실로 오게나.]
김빠지는 소리가 나며 촛불이 흔들렸다.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아카네는 그 짧은 문장을 연거푸 읽었다. 11시 59분. 다시 보니 어제 온 거였다. 날짜가 다르니 생일 축하가 아니라고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최근 타키온은 어떤 연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날짜가 바뀌었는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그래도 안 챙겨준 적은 없었는데. 답장하려던 엄지손가락이 자꾸만 허공을 맴돌았다.
“나 왜 이래. 유치하게, 진짜…”
[알았어. 이따 보자.]
짧은 답을 남기고 아카네는 촛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이 방을 뒤덮고, 옅은 향기만이 그 곁에 남았다. 더듬거리며 아카네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겨울용이라 두툼한데도 차갑기만 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핸드폰이 울렸지만 아카네는 눈을 꼭 감았다. 일어나는 대로. 그 말이 평소보다 일찍 오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기에. 어쩐지 잠이 오진 않았지만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하네.]
그 때문에 타키온의 생일 축하를 몇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한 아카네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어서 오게나, 아카네 군! 기다리고 있었네!”
“어, 어. 안녕, 타키온. 그런데…”
아카네는 말을 끊고 발 폭을 크게 벌려 성큼성큼 타키온에게 다가갔다. 타키온은 그런 아카네를 의자에 앉은 채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아침부터 이상하리만치 텐션이 높다. 실험이나 연구가 잘 풀렸을 때 타키온이 혼자 신나 하는 건 곧잘 있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에 아카네가 허리를 숙여 찬찬히 타키온을 살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선명히 보였다.
“…타키온 혹시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글쎄. 자네에게 연락하고 나갔으니 12시는 넘었겠군.”
“뭐? 통금에 걸리지 않게 내가 바래다줬는데도 굳이 여기 다시 돌아와서 밤을 새웠다고?”
“어쩔 수 없었네. 시간이 촉박했거든. 소위 말하는 서프라이즈를 위해선 자네에게도 감춰야 했고. 하하! 아마 오늘이 자네의 짧은 인생 중 가장 특별한 생일이 될 걸세! 내 장담하지!”
“나보다 어린 너한테 짧은 인생 소리 들어도 말이지… 그래서? 뭘 준비했는데?”
타키온의 입꼬리가 기고만장하게 올라가고, 그에 반비례해서 아카네의 눈썹이 처졌다. 타키온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다. 주춤 오른발이 뒤로 빠질 때 타키온이 불쑥 플라스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모로보시 아카네 생일 기념 육체 개조 실험일세!”
“평소에 늘 하던 거잖아!”
“아니! 무슨 소리인가! 다르네!”
진짜 억울한지 타키온은 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벌려져 있던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타키온이 아카네의 손을 붙잡았다. 뿌리칠 겨를도, 마음도 없이 서로의 손이 얽히며 플라스크가 아카네 손에 쥐어졌다.
“이건 바로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니까.”
타키온의 말에 아카네는 저도 모르게 침을 한 번 삼켰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에서 도망치듯 시선을 그대로 내리자 플라스크에 자신의 눈이 비쳤다. 투명하고 붉은 액체 때문에 자신의 눈도 꼭 타키온과 똑같아진 것 같았다. 플라스크 병을 조심히 들고 아카네가 반걸음 물러섰다. 약물이 아카네의 맘 따라 일렁거렸다. 아카네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일부러 무심한 목소리를 냈다.
“어… 숙면할 수 있는 약이야?”
“그러면 그냥 평범한 수면제 아닌가!”
“그렇지만 예전에 어려졌을 때 그 소리 듣고 먹은 약이 수면제였잖아.”
“오늘 건 그때와 차원이 다르네! 자자, 어서 쭉 들이키게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한데…”
아카네가 와인처럼 플라스크를 부드럽게 돌렸다. 약에서부터 올라오는 달큰한 향기가 아카네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타키온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떠드는 걸 좋아하는지라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약에 대한 설명은 꼭 따라왔다. 그런 타키온이 꿈을 이룬다는 추상적인 말만 하고 그 뒤가 없다니. 아카네는 불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차가운 플라스크 표면을 제 입술에 갖다 댔다. 어차피 자신에게 안 마신다는 선택지란 없다. 잠시 멈춰있던 아카네는 이내 각오를 굳히고 약물을 들이켰다. 달콤한 향과 다르게 식도가 다 화끈거렸다.
“으, 뭔가 엄청 독한 과일주를 먹은 것 같네.”
“그런가. 자! 다 마셨으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눕게!”
“누워? 왜?”
“곧 알게 될 걸세.”
타키온이 간이침대를 자진해서 펼치고는 그 위를 탕탕 두드렸다. 영 불길한 것을 다 보겠다는 것처럼 아카네는 표정을 구기면서도 얌전히 그 위에 누웠다. 아예 담요까지 꼼꼼히 덮어주는 통에 접힌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뭔데, 대체… 뭐라도 좀 알려줘…”
“후후, 모처럼의 서프라이즈인데 그럴 순 없지! 즐거움으로 남겨두게.”
“아니, 내가 아는 서프라이즈랑 달라도 너무 달라서 무섭… 컥!”
쿵. 뇌와 심장이 동시에 울렸다. 위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들끓더니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카네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손으로 심장 부근을 쥐어뜯으려 하자 타키온이 그 손을 붙잡고 강제로 떼어냈다. 다른 쪽 손가락으로 손목을 지그시 누르는 걸 보니 이 와중에 맥을 짚는 모양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시야만은 또렷했다. 타키온은 다소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아카네를 진득이 관찰하고 있었다. 붉은 눈 한 가운데에 박힌 동공도, 살랑살랑 움직이는 머리카락 한 올도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여 무서울 지경이었다. 쏟아지는 정보의 양에 아카네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니 다른 감각들이 선명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간이침대가 삐그덕 울고, 입에는 단맛이 여전히 감도며, 부유하는 공기 중에선 겨울 특유의 찬 내가 났다. 그리고 타키온의 손은 따뜻했다. 아카네는 끓는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발끝으로 침대를 긁었다.
“흠. 전신에 작용하는 약인 만큼 이번 것도 부작용이 크군. 맥박 상승, 과호흡, 미열… 근육 수축에 따라 통각도 있나 보군. 이런, 이건 좀 미안하게 됐네, 아카네군.”
“타, 타키온…!”
“그래. 여기 있네.”
이제 맥은 잴 필요가 없는지 타키온이 손목에서 손을 떼고 아카네의 이마를 쓸었다.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손길이 부드러웠다. 타키온은 땀을 훔쳐내며 아카네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댔다. 그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닿아 아카네가 움찔거리자 타키온은 낮게 웃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게나.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 질 걸세.”
이상한 일이었다. 온몸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그 속삭임이 마법이라도 되었는지 아카네는 천천히 수면 아래로 빠져들었다.
“아카네 군. 아카네 군!”
“으윽…”
“얼른 일어나게! 일생 최대의 순간을 그냥 누워서 보낼 셈인가!”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불평은 됐으니 이거나 보게나! 자!”
갑작스레 날아든 빛에 아카네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서 막았다.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그의 눈앞에는 작은 손거울이 있었다. 형광등 빛이 거울에 반사된 모양이었다. 아카네는 타키온에게서 거울을 받아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몸부림쳐서 그런지 단정히 묶었던 머리는 풀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머리핀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간 뒤였다. 땀 때문에 엉망진창 얼굴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꼴을 보니 한숨이 새 나갔다.
“뭘 보라는 거야… 엉망인 내 꼴?”
아카네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당연히 귀에 걸쳐져야 할 것이 손을 떼자마자 스르륵 떨어졌다. 당황한 손이 볼 뒤를 계속 더듬었다. 없다.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어?”
“후후, 내가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타키온은 손거울을 다시 빼앗아 들더니 조금 멀리서 아카네를 비추었다. 아까와 똑같이 빛이 반사되었지만, 아까와 달리 아카네는 눈을 가리거니 감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자기 머리 위에서 작긴 해도 우마무스메와 똑같이 생긴 귀가 달려 있었으니까. 아카네는 손을 들어 자신의 귀 같은 것을 만졌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동시에 어설픈 손길에 간지럽다. 꿈이라고 하기엔 손과 귀 양쪽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촉감에 아카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 설마. 내 꿈이라고 했던 게…”
“실험은 성공일세! 인간이 우마무스메가 되는 약이기에 사전 실험을 할 수 없는 점이 위험 요인이었는데 다행히 잘 되었어. 자, 어서 감상을 말해보도록 하게. 지금 기분이 어떻지?”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지금 자네의 평생의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그 반응은 뭔가?! 좀 더 다른 게 있을 것 아닌가. 감격스럽다든가, 두근두근 이라든가. 짧고 가벼운 어휘라도 괜찮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그렇지만 실감이 안 나는걸…”
거울 속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카네는 엉망으로 묶여있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를 빗어 내리는 내내 귀가 위아래로 쫑긋거렸다. 움직이는 감각은 들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있어 보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니 영 어색하기만 했다. 설마 꼬리도? 문득 든 생각에 아카네는 담요를 걷고 조심스레 발바닥을 바닥에 댔다. 타키온도 어서 일어나라는 건지 옆으로 피해주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느낌은 의외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등에 손을 대자 꼬리가 바지를 약간 아래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솟아있었다. 손이 닿자 놀란 꼬리가 바짝 섰다. 좀 전에 빗던 머리카락과 감촉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아카네는 떫은 미소를 지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푼 후, 발 앞꿈치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편자도, 신발도 없는 발로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쉰 아카네가 타키온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달려봐야 뭐라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 아하하하! 그런가! 그렇군! 자네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타키온은 웃음을 흩뿌리며 연구실 구석으로 가더니 신발 두 켤레를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신발 사이즈 다를 텐데 일부러 빌려온 걸까. 제대로 절차 밟고 빌려온 거 맞을까. 또 다른 불안이 아카네의 마음속에 싹텄지만, 바닥을 두드리는 편자 소리에 날아갔다. 딱 봐도 자기 발에 맞는 운동화가 발 바로 앞에 있었다. 흘끔 타키온을 보자 그는 먼저 운동화에 발을 꿰어 넣고 있었다. 아카네가 머뭇거리며 발을 들자 그를 향해 하얀 손가락이 커튼처럼 차르륵 펼쳐졌다.
“달리러 가지, 함께.”
11월 29일. 지금 당장은 해가 있긴 하지만 전날 눈이 왔기에 잔디 상태는 불량. 심지어 4시경에 비나 눈이 예상되어 있어 다들 야외 트레이닝은 피해 실내로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한산한 운동장을 두 우마무스메가 가로질렀다. 어울리지 않게 체육복에 달린 트레이너 배지가 약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잔디에 쌓인 눈보다도 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둘의 뺨만은 불그스름했다.
“트윙클 시리즈에서의 첫날. VR에서 자네가 잠재 뇌 기능을 반영한 우마무스메의 육체를 조작한 적이 있었지. 몇 년 전의 데이터라 현재의 자네와 차이가 있을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후 재측정하면 될 테니 큰 문제는 안 되려나. VR로 구현한 신체와 약물로 재현한 신체의 차이는 어떠할 지 이 또한 흥미롭군!”
“생일 축하니, 내 꿈이니 했지만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건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친애하는 모르모트를 위해 내 귀중한 시간을 들여 어떻게든 자네의 생일날 완성을 시켰건만!”
“아, 알았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무튼 그래서 얼마나 달리면 돼?”
“기본적인 신체 기능 측정은 했지만, 자네의 달리기가 어느 정도일 지는 나로서도 미지수이네. 더군다나 현재까지와 다른 육체를 쓰는 만큼 처음에 무리하면 부상 위험도 높아. 잔디 상태도 좋지 않으니 말이지. 그러니 일단 차분하게 갈까. 우선 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따라서 뛰어보게. 서서히 속도를 높일 것이니. 자네 상태를 확인한 후에 거리를 지정하여 기록을 측정하지.”
“알았어.”
“심전위, 심박, 호흡, 근전위 측정·기록! 하하하! 자네 지금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 건가. 뛰기도 전에 심장이 엄청 뛰고 있군!”
“그런 건 말로 안 해도 알아…”
아카네는 민망스레 양 뺨을 감싸면서도 착실히 자세를 잡았다. 아카네가 타키온의 실험에 참여한 것도 3년 차. 어설프게 허둥지둥 달리던 초반과 다르게 이제는 제법 각이 잡혀 있는 것을 보고 타키온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발목을 풀어주고 타키온이 그 옆에 섰다. 아카네는 시선은 정확히 타키온의 옆얼굴에 꽂혀 있었다. 언제나 혼자 여유로운 척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그의 인상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아카네는 타키온의 달리기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많이 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표정을 이렇게까지 지근거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짝 선 눈썹을 마음속으로 덧그리며 아카네가 숨을 삼켰다.
사전에 정해준 시작 구호는 없었다. 그럼에도 둘 다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타키온이 한 번 턱을 당겼을 때. 둘은 거의 동시에 출발했다. 타키온이 능숙하게 코스를 잡고, 아카네는 그 등을 바라보는 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우선 1마신 차. 하얗기만 하던 운동장에 둘의 편자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처음에는 인간이어도 따라 잡을 수 있는 속도로 느긋이. 반 바퀴를 돌았을 때 타키온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이 정도는 일상이라는 것처럼 차분히 따라오는 아카네를 보고 히죽 웃더니 단숨에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우마무스메의 평균 속도까지. 점점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아카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빠르다. 아카네가 우마무스메로서 달리게 된 첫 감상은 그게 다였다. 심지어 생략된 주어는 타키온이었다. 일단은 같은 우마무스메일 터인데도 차이가 왜 이리 극심한지. 타키온이 흩뿌리는 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카네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과 우마무스메의 달리는 자세엔 차이가 있다. 꼿꼿하게 축을 세우는 인간과 달리 우마무스메는 상체가 쏟아질 듯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숙인다. 이론은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아카네는 힘차게 대지를 박찼다. 꼿꼿했던 허리가 점차 앞으로 기울어졌다. 어설프게 폼을 따라 한 것이니 타키온처럼 깔끔하진 않다. 그럼에도 확연하게 속도가 달라졌다.
“와!”
저절로 아카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VR에서의 경험은 실제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폼을 바꾸자마자 다리에 실리는 부하가 묵직해지고,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아카네의 뒤로 넘어간다. 옅은 햇빛, 편자 소리, 주위 풍경, 차디찬 공기, 잔디 냄새… 유일하게 타키온의 등만이 저 앞에 있었다.
“어이! 아카네군! 여전히 느리지 않은가!”
“조금만 기다려줘!”
“싫네. 알아서 따라오게나.”
“하하! 진짜 못 말리겠다니까!”
호쾌한 웃음소리에 타키온은 뒤로 시선을 던졌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보이는 거라곤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뿐이었다. 힘든 것인지 아카네는 지면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앞을 제대로 안 보면 다칠 텐데. 우려심에 타키온이 입을 연 순간 고개가 홱 들렸다. 아카네는 웃고 있었다.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푸른 눈은 스카우트를 한 날과 똑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보며 타키온은 따라 웃었다. 그러고선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더욱 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불가능해 보일수록 무아몽중으로 목표만을 쫓는 게 바로 모로보시 아카네니까.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멀리멀리 달려 나갔다.
한 2,000m를 돌파하자 타키온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아카네는 타키온을 보고 급하게 멈추었다. 정확히는 멈추려다가 눈에 미끄러져 그대로 엎어졌다. 타키온은 눈대중으로 자신과 아카네의 거리를 짐작했다. 약 7마신 차. 타키온이 선 채로 턱을 짚는 사이, 아카네가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질척한 흙이 그의 팔다리에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화려하게 넘어졌군. 다친 데는 없나?”
“헉… 헉… 응…”
“흠. 신체 능력은 그때 당시 VR에서 구현한 것보다 떨어지는군. 지금은 데뷔를 앞둔, 아니지. 이제 겨우 데뷔를 한 우마무스메 정도인가. VR에서는 나이를 감안해서 계산했으나, 실제 육체는 막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거기서 차이가 발생한 걸 수도 있겠어. 좋아. 아카네 군 다음은…”
타키온의 말을 끊은 것은 그 어떤 말도, 불청객도 아니었다. 조용히 서 있는 아카네의 모습이었다. 아카네는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과 운동장에 남은 편자 자국을 마냥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펴보거나,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기도 했다. 흥분으로 거칠어졌던 호흡은 좀처럼 진정될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건지. 타키온은 당장 지금 기분이 어떤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은 참았다. 그가 이토록 즐거워하는 건 처음 보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아카네의 반응을 관찰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카네가 먼저 타키온에게 뛰어갔으니. 그녀는 본인 얼굴에 흙이 묻은 지도 모르고 방긋 웃었다.
“타키온!”
“말해보게.”
“이거, 엄청나다.”
“후후, 그런가.”
“정말…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왜 우마무스메에게 달리기가 본능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아. 이렇게나 빠른데 달리지 않는 게 이상하지. 우리가 쫓는 「한계의 너머」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실감이 나. 아아, 이런 생각 따위 다 제쳐두고 지금 내 감정만 말해보자면…”
아카네는 잠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기도하는 것처럼 양손을 모았다. 살포시 눈을 감자 방금 뛸 때 본 풍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두근두근 손 아래에선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닐세. 현실이지.”
볼에 닿는 감촉에 아카네는 번뜩 눈을 떴다. 타키온이 자신 못지않게 들뜬 표정으로 제 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꼬집기라도 할 심산인가. 피하지도 않고 타키온이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으려니 타키온은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쓱 훑고 곧장 손을 뗐다. 엄지손가락에는 거무죽죽한 흙이 묻어있었다.
“이번엔 레이스처럼 뛰어보도록 하지. 거리는… 그래, 1,600m로 할까.”
“마일? 너하곤 안 맞는 거리잖아.”
“자네한테 맞춘 거니까 말이지. 중거리는 인간 몸으로도 뛰어 봤으니 나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자네는 더 짧은 거리가 맞을 것 같네. 내가 앞서서 뛸 테니 그 뒤에서 페이스를 잡게. 마지막에는 나를 따라잡겠다는 심산으로 뛰게나.”
“알겠어.”
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그 누구도 조금만 더 쉬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겨우 예열이 된 양 굴었다. 둘은 목을 꺾거나 어깨를 돌리는 식으로 각자 몸을 풀며 다시금 출발선에 섰다.
“제자리에 서서.”
몸풀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타키온이 준비 신호를 던졌다. 비록 연습이지만 레이스. 그 실감이 들기 시작하며 아카네의 전신에 긴장에 뻗어 나갔다. 오른발이 더 뒤로 빠지며 땅이 얕게 패였다. 타키온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고, 흔한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준비 땅. 둘 다 동시에 달려 나가서 깔끔한 스타트를 끊었다.
선두에 선 것은 이번에도 타키온이었다. 능숙하게 안쪽 코스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타키온의 시야각에선 머리카락 한 올 발견되지 않았다. 타키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바로 내 뒤에 있나. 아카네는 가까운 거리 탓에 자꾸만 날아드는 흙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트레이닝은 본의 아니게 꾸준히 하고 있으나, 타키온이 확언한 대로 현역에 견줄 신체 능력은 없다. 항상 혼자 뛰기만 했으니 레이스 경험도, 깔끔한 폼도 없다. 그나마 자신 있게 내놓을 거라고는 트레이너로서 가진 지식뿐. 아카네는 상체를 서서히 숙이면서도 눈은 앞에 고정했다. 타키온이 그를 떨쳐내기 위해 좌우로 움직여도 봤지만, 아카네는 끈질기게 그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집요함에 타키온이 남몰래 웃었다.
마지막 코너. 타키온이 인코스로 가파르게 코너를 파고든 반면, 아카네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아웃코스로 밀려났다. 멀어져 가는 붉은 머리칼을 훔쳐본 타키온이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 적성에 비해 확연히 짧은 거리라 속도가 제대로 나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이걸로 충분할 터였다. 아카네를 이기는 데에는.
“흐아압!!!“
괴성과 함께 바람이 나부꼈다. 아웃코스로 밀려난 대로 아카네는 올곧게 직선 코스로 달려들었다. 타키온의 페이스에 맞춰 따라오느라 남은 체력은 얼마 없을 텐데 그마저도 모조리 불사르겠다는 각오로 대지를 박찼다. 코너에서 벌어진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4마신에서 3마신, 3마신에서 2마신.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타키온은 작은 전율을 느꼈다. 여유 부리다간 정말로 진다. 그런 확신이 머리를 강타했다. 2마신에서 1마신, 그리고 종국에 아카네는 타키온과 나란히 섰다. 그대로 둘이 얽히듯이 골인. 카메라 판독이 불가한 상황이지만 둘 다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스태미나가 떨어진 아카네가 허리를 펴고 말았고 근소한 차이로 타키온이 이겼다는 것을. 타키온은 먼저 주저앉은 아카네를 두고 조금 더 멀어져서야 겨우 멈추었다. 그는 즐겁게 두 팔을 펼쳤다.
“아하하하! 정말 굉장하군, 자네는! 아무리 내 적성에 맞지 않은 거리고, 내가 봐주었다고 해도 이쪽은 현역인데! 그런데 마지막에 나를 따라잡는다고? 이것 참! 그 몰입과 광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가능만 하다면 자네의 뇌를 열어보고 싶은 지경인걸!”
지금쯤 농담이라도 끔찍한 소리는 말라는 잔소리나, 흥분으로 가득 찬 웃음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정적만이 타키온을 감싸자 그는 몸을 틀었다. 자신보다 큰 아카네가 바로 보이지 않아 시선을 내려보니 아카네는 쪼그려 앉아 있었다. 스태미나가 떨어져서 지친 건가. 그렇다 하기에는 무언가가 이상했다. 둥글게 말린 어깨가 들썽거리고 있다. 타키온은 한 발짝씩 아카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다리를 가리고 있던 등을 지나치자 그제야 발이 보였다. 떨리는 양손으로 감싸 쥔 발이. 설마. 섬뜩 불온한 예감이 타키온의 뇌를 치고 지나갔다. 말 대신 입김만이 타키온의 입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타키온.”
시린 고요를 깨트린 건 청아한 목소리였다. 아카네는 허리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폈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있던 그녀가 짝다리를 짚은 것을 보고 타키온은 입을 다물었다. 온전히 지면을 닿지 않은 다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이내 아카네가 주먹을 꽉 쥐더니 이제껏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실험 중단해 줘.”
“발등 골절이래.”
아카네는 태연하게 보고했다. 왼쪽 발에는 구두나 운동화도 아니고, 반깁스를 신고. 그는 목발도 없이 절뚝거리며 걸어와 대기실에 있던 타키온 옆에 털썩 앉았다. 아카네에게서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 타키온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인간으로 돌아와도 뼈가 붙진 않는구나. 뭐, 당연한가.”
“정확히 어느 정도 부상이지? 회복까지 걸리는 기간은?”
“어… 5중골이었나? 아무튼 외곽 뼈에 금이 갔고, 일단 수술할 필요는 없대. 치료는 아마 4주에서 8주? 한동안 많이 부을 거니 다음 주에 부기 빠지고 다시 보자고 하시더라고. 통깁스로 바꿀 수도 있는데,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바로 조치했으니 반깁스로 쭉 갈 수도 있어.”
“그렇군.”
타키온은 딱 한 마디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타키온의 성격상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이번 건 단순 사고에 가까운데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아카네는 멀쩡한 다리를 흔들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까? 날이 추우니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으려나.”
“지금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인가?”
타키온이 으르렁거리며 아카네의 어깨를 붙들었다. 파고드는 통각에 아카네가 인상을 쓰자 타키온은 곧장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 틈 사이로 엿보이는 붉은 눈은 침잠하고 있었다.
“자네가 아무리 우마무스메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실제 육체를 쓰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는 걸 간과했어. 자네에게 우마무스메의 육체란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 아닌가. 힘을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감각이 아예 무지하지. 어린 우마무스메들에게 달리기 전 먼저 힘을 다루는 법부터 가르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인데. 다짜고짜 레이스를 했다니. 이래선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여 주었던 거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그 칼이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하지만 상대는 성인인데. 떠오른 반박에 타키온은 손을 내렸다. 자신보다 큰 트레이너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네 설마 알고도 일부러…”
“아냐, 아냐!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뭐… 마지막 스퍼트하려고 발을 딛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런데 대체 왜 도중에 멈추지 않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달렸지?”
“그야 당연히.”
또렷한 눈동자가 데굴 굴러 타키온을 고스란히 담았다.
“널 따라잡는다.”
타키온은 그 눈동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크기 때문일까. 위에서 비친 자신은 어쩐지 작아 보였다. 이내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멈출 수가 없었어. 멈출 만큼 심한 부상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네 옆에 서고 싶었거든. 이렇게 너랑 뛸 일도, 네 달리기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거의 없잖아. 이번 약효는 한 시간이었나? 짧았네. 정말.”
반쯤 중얼거리던 아카네는 돌연 두 손을 활짝 펴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튼 이건 흔히 있는 사고고, 따지자면 내가 자초한 일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해. 한동안 실험 참여가 어렵겠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돌아가서 밥 먹고 케이크나 먹자. 미리 사둔 게 있거든. 내 방에 가서 같이 먹자.”
먼저 일어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아카네를 보고 타키온은 기가 차 한숨을 뱉었다. 지금 그런 다리를 하고서 누굴 일으켜 주겠다는 건지. 타키온이 손을 잡지도 않고 알아서 일어나자 아카네는 민망하게 손을 뒤로 감추었다. 타키온은 그런 아카네 앞에 서더니 등을 보이게 쪼그려 앉았다.
“뭐야?”
“업히게.”
“아니, 그럴 필요는…”
“잔말 말고. 이럴 때는 내가 자네를 돌봐야 하지 않겠나.”
타키온이 도저히 물러설 것 같지 않아 아카네는 어쩔 수 없이 등에 제 몸을 기대고 목에 팔을 감았다. 이렇게 맞닿고 있으니 평소 티 나지 않았던 서로의 체격 차가 실감이 났다. 그 정도야 우마무스메에겐 우스울 지경이라 타키온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정신으로 업혀있는 아카네만 죽을 맛이었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는 타키온 목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정도를 모르고 움직이는 것 같으니 내가 통제해야겠어. 정말이지. 뇌가 위험하단 판단을 했으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으윽… 나도 반성하고 있어…”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찬 바람이 아카네의 맨 귀를 매만졌다. 어깨 너머로 앞을 훔쳐보니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온 거리가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만큼 색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생일 케이크 촛불도 못 붙였는데 크리스마스 조명을 먼저 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카네는 타키온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허리를 쭉 폈다. 머리 위에 있는 귀에 입을 가까이 댈 순 없었지만 말을 전하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타키온.”
“왜 그러지?”
“고마워.”
“…”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을 보냈어.”
“자네는 정말…”
타키온은 뭐라 하려다가 그저 아카네의 다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반깁스가 달랑거리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아카네 군은 실험 참여가 어렵다고 했지만, 아무튼 몸만 안 쓰면 되지 않나? 신체 회복력, 골밀도 등 여러 수식을 머릿속으로 늘어놓으면서도 입으로는 다정한 말을 건넸다.
“친애하는 모르모트를 위해 준비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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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새치기 견제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6,923자
아카네 군이 본가로 내려갔다. 나에게 사전 보고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이나 혼자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먼저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묻긴 했겠다만. 아카네 군은 지난번 쓰러지고선 본인도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잠시 재정비하고 오겠다고 했다. 집에 간다고 해결이 되는가. 이동에 따라 피로감이 더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나. 나로서는 의문투성이였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보내주었다. 자연스럽게 트레이닝도 잠시 정지. 자율 트레이닝이나 실험은 편하게 하라고 했다. 아마 본인도 말하면서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 말하면 내가 실험이나 할 거라는 걸. 그러니 그 뒤에 트레이너실에 먹을 거 남겨두었다는 말을 덧붙인 거겠지.
아카네 군이 없는 트레이너실 문을 열었다. 햇볕을 받아 먼지들이 허공을 부유했다. 사람 하나 없다고 공기가 꿉꿉하게 느껴져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열까 하다가 관두었다. 트레이너실에 비치되어 있던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안쪽에 있는 반찬통 3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용기가 투명해 내용물이 바로 보였다. 샐러드인가. 옆에는 당근 드레싱 통도 함께였다. 좀 더 제대로 된 식사 메뉴일 줄 알았다만. 하나만 꺼내어 투명한 통 너머를 이리저리 살폈다. 양상추, 채 썬 당근, 옥수수콘, 닭가슴살, 병아리콩, 삶은 달걀 따위가 통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한 면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갈아 먹지 말고 제대로 씹어 먹어.]
웃음이 나왔다. 너는 내가 전자레인지 등에 음식을 데워 먹을 위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한 거였군. 하나를 챙겨 아카네 군이 늘 있던 책상에 앉았다. 관점이 바뀌니 익숙했던 트레이너실도 다시 보인다. 참고 서적과 개인 파일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 끝엔 나와 닮은 인형이 3체 놓여 있었다. 2개는 내가 있을 때 뽑은 거니 나머지 하나는 기어코 따로 뽑은 건가. 내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는 아카네 군의 눈높이와 맞는 곳에 쭉 늘어져 있었다. 그 이력을 하나하나 훑으며 뚜껑을 열었다. 색색깔의 샐러드를 감추듯이 주황색 드레싱을 그 위에 뿌렸다. 포크를 통에 깊이 꽂고선 그대로 입에 집어넣으니 와삭 소리가 났다.
“차가워."
온도가 이렇게까지 미각에 영향을 끼치는 거였나. 드레싱을 잔뜩 뿌렸음에도 양상추도, 당근도 그다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란 참으로 귀찮은 행위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한다.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전 식사에 대한 기억을 반추해 볼 수록 흐뭇하게 날 바라보던 네 얼굴만 떠올랐다. 제대로 씹어 먹으라는 네 필체가 함께 메아리쳐서 맛도 없는 샐러드를 꾸역꾸역 먹어 치우고 있었다. 텅 빈 통은 그대로 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떴다.
눈을 문지르다 문득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이리 눈이 뻑뻑하나 했더니 앞에 있는 모니터 말고는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있었다. 카페는… 오늘은 트레이닝을 안 하는 날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샤커 군이라도 부르는 것을. 어느 누구 말 한마디 걸지 않은 채 연구에만 온전히 몰두한 건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아카네 군이든, 카페든 누군가가 중간중간 집중을 깨뜨려 주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바깥 역시 캄캄한 건 마찬가지였다. 쨍한 조명들 아래,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인영이 몇 명 있는 것을 보아하니 통금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항상 이 시간쯤 아카네 군이 데리러 왔으니 생체리듬상 자연스럽게 주의가 흐트러진 모양이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떡할까. 누구와 달리 바이크가 없긴 하지만 달리는 속력은 비슷하니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야 통금에 걸리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아직 하던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 가닥은 어느 정도 잡아두긴 했지만, 연구란 답을 직접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에 얼마나 걸릴 지도 미지수다. 진행한 것이 있으니 계속 끝까지 가볼 것인가, 흐름이 끊긴 김에 우선 돌아가고 추후를 도모할 것인가.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습관적으로 홍차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식어버린 지 오래된 홍차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아 마른 입술만 겨우 축였다.
그러고 보니 후지 군과 아카네 군은 서로 연락하던 사이였지. 통금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카네 군에게 연락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곤란하군.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곤란해? 어째서? 아카네 군을 따라 하듯 검지손가락으로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후지 군의 연락을 받으면 아카네 군은 분명 나에게 연락을 할 거고, 그건 연구에 방해되니까. 바로 타당한 이유가 떠올랐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게 문제라면 스마트폰을 꺼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건 또 내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책상 한쪽에 뒤집어 두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상단 바에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또 연구 중?]
도착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3시간 전이었다. 그 이전에는 방금 집에 도착했다거나 밥 먹었냐는 등 별 볼 일 없는 내용이 쌓여 있었다. 한참 동안 답장이 없으니 저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관둔 모양이다. 방해라고 생각한 걸까. 딱히 그렇지 않은데도. 스스로에게 모순을 느껴 턱을 괴었다. 일단 답장이라도 해둘까. 액정에 막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었을 때 돌연 화면이 검게 변하며 ‘모로보시 아카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에 눈썹이 움찔거린다. 여성, 20대, 다소 가벼운 톤, 불명확한 발음. 파편적인 정보나 줍는 대신 바로 질문을 던졌다.
“누구지?”
“응? 어? 어… 모로보시 네 아니에요?”
“모로보시는 이 핸드폰 주인일 텐데.”
“그건 그렇긴 한데 그…”
“뭐해?”
“아니, 너희 집에 미리 연락해 두려다가.”
스마트폰을 얼굴에서 뗐는지 목소리가 멀어졌다. 너 단축번호 1번 너네 집 번호 아니었냐는 질문만 희미하게 들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노이즈가 끼어든다 싶더니 이내 청아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여보세요?”
“아카네 군.”
“타키온?”
이름 뒤에 딸꾹질이 덧붙었다. 목소리도 묘하게 늘어지고 있어 한 번 찌푸려진 눈썹이 펴질 줄을 몰랐다.
“어라? 웬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 있어?”
“전화한 건 내가 아니다만.”
“으음? 내가 전화했던가?”
“자네도 아니… 잠시만, 지금 술 마신 건가?”
“으응. 조금. 친구 만나서. 오랜만에.”
어절이 뚝뚝 끊기고, 어순이 뒤죽박죽 섞인다. 대화에 맥락이 잘 잡히지 않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취했군. 헛숨이 터졌다. 아카네 군이 술을 마시긴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본인 방 냉장고에 맥주 캔이 있는 걸 보고 물은 적이 있으니. 어쩌다 한 번 마시는 거고, 평소엔 실험에 영향이 없도록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고 했던가. 여름 합숙 때 다른 트레이너들과 회식도 했던 것 같은데 주량이 좋은 건지, 알아서 조절한 건지 멀쩡하게 두 다리로 취한 이를 챙기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비록 목소리 뿐이어도 분명 흥미로워야 할 터인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나에게 연락이 더하지 않았던 게 단순히 친구를 만나 술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타키온.”
“왜 그러지?”
“응. 타키온.”
“왜 자꾸 부르는 거지? 이게 술주정이라는 건가? 멀쩡히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정말이지. 재정비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알코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진 않을텐데? 이래선 상태가 더 나빠질 것 같다만. 일단…”
“푸흐흐."
“갑자기 왜 웃지? 이것도 술 때문인가?”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아.”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이 꾹 다물렸다. 조용해진 나와 다르게 아카네 군은 자꾸 웃음을 흘렸다.
“이상해. 오랜만 같아. 엊그제 봤는데.”
“후후, 그렇군.”
취하면 웃는 타입인 건가. 새로운 정보를 뇌 속에 입력하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모니터에 떠오른 문자열은 잠시 뒤로 하고 의자를 돌려 창문을 마주 보았다. 이제 보니 밤하늘에 상현달이 떠 있었다.
“타키온, 밥은?”
“먹었네. 자네가 트레이너실에 남겨둔 것.”
“맛있었어?”
“먹을 만했네.”
“으응. 별로였구나. 지금 어디야?”
“연구실이지.”
“그렇구나. 음. 어? 통금 아직?”
“얼마 안 남긴 했네. 아직 마무리가 안 되었다만 슬슬 정리하도록 할까.”
"응. 착하다아."
웃음을 참으려 입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릴 때도 못 들어본 칭찬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그 아카네 군이 뇌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말하는 것이 제법 재미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떤 질문에도 순순히 답해줄 것 같다. 좋아, 무엇을 물어볼까. 즐거워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틈을 타 상대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전화를 왜 했지?”
“전화한 건 자네가 아니라… 흠, 아니지. 글쎄. 왜일 것 같나? 생각해 보게.”
“음… 보고 싶어서?”
졸린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수화기 너머, 몇 km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입가에 있던 손은 점차 올라가 눈을 덮었다. 혀가 달싹거리다가 무의미하게 너를 불렀다.
“…아카네 군.”
“응…”
“아카네.”
“…으응?”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부르면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참 너다웠다. 무엇을 물어볼까, 골똘히 궁리한 게 허무할 정도로 아주 사소한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일 몇 시쯤에 돌아오지?”
“어… 아마도…”
기어가는 목소리로도 너는 충실히 대답했다. 이내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나고, 주변에서 연신 네 이름을 불러댔다.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동으로 의자가 두어 번 회전했다. 펼쳐두었던 논문과 자료 창을 하나하나 지우고 노트북을 종료하자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을 한 나 자신이 퍽 낯설었다.
지쳤다. 처진 어깨를 타고 가방이 미끄러져 바닥에 쿵 떨어졌다. 뭘 이렇게 많이 넣어준 건지. 신발만 벗고 현관에 걸터앉아 가방을 열었다. 나는 내 가방에 이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녹차, 와사비, 소금, 기념품용 쿠키…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평소 신세 지는 사람들에게 드리라며 부모님께서 꾸역꾸역 넣어주셨다. 앞으로도 오래 일하려면 주변 사람을 잘 챙겨야 한다나, 뭐라나. 바로 정리할 힘이 안 나 쭉 늘어놓고 팔짱 끼고 바라보았다. 이걸 그냥 이대로 드릴 수도 없으니 쇼핑백이라도 사서 담고, 드리러 다닐 걸 생각하면… 심지어 대부분 식품류라 미룰 수도 없다. 이마를 짚다가 피식 웃음이 샜다. 집을 나오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야 내가 트레이너로서 있어도 된다고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러셨듯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신기하게도 그 말이 예전과는 다르게 들린다. 가업이나 이으라는 게 아니라, 집이니까 말 그대로 편히 오라고. 지치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역시 다녀오길 잘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쌓여있던 하소연도 실컷 했고. 덕분에 숙취로 속은 좀 쓰렸지만 나름 괜찮은 대가였다. 이쪽에 있는 지인들은 다 동종업계라 언제, 어떻게 당사자 귀에 들어갈지 몰라 뒷담화 같은 건 꿈도 못 꾸니 원.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니 더 삽질할 것도 없다. 얼마 전에 타키온 실험으로 한 트레이너가 못 볼 꼴도 당했으니 이젠 저번과 같이 불미스러운 일은 없겠지.
마음 편히 굳은 어깨를 휘휘 돌리다가 문득 창문에 눈길이 갔다. 며칠 사람 없었다고 묘하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환기부터 할까. 내려둔 가방을 슬쩍 발로 밀어두고 창가로 갔다.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였다.
“여어, 아카네 군! 슬슬 도착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만 타이밍이 좋았군.”
“타, 타키…!!!”
합. 비명이 터져 나오기 전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도 트레이너 기숙사에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은 금물. 당연히 담당 우마무스메도 포함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내 담당 우마무스메께서는 오늘도 당당하게 창을 넘어 들어오셨다. 어벙하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날 두고 타키온은 위아래로 나를 살폈다.
“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안색이나 표정이 꽤 좋아졌군, 그래. 의외로 그 재정비란 것을 제대로 한 모양이야. 흐음, 숙취라고 하는 것도 딱히 없는 것 같고.”
“그야 숙취해소제도 먹고 식사도 제대로 했으니까… 그보다 왜 왔어? 지금 실험은 좀 곤란한데.”
“실험은 안 하네. 체내에 알코올이 남아있는 모르모트에게 실험할 것도 없네.”
손을 휘적거리며 타키온은 태연하게 내 방을 가로질러 식탁까지 갔다. 의자를 끌어 거기에 척 앉더니 아예 다리까지 꼬았다.
“아카네 군.”
“응.”
“배고프네.”
“…응?”
“빨리 밥을 차리게나.”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황망히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타키온이 앉아 있는 의자를 붙들었다.
“가, 갑자기? 겨우 그거 때문에 온 거야?”
“갑자기라니.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지 않나? 어차피 자네도 식사는 해야 할 거고.”
“아니, 그 말에 틀린 건 없지만 내가 지적하는 게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나 대충 먹으려고 했는데…”
“대충도 상관없네. 난 지금 배가 고프니까. 자. 빠~알~리, 빠~알~리!”
“으윽! 알겠어! 그렇게 보채지 말고 좀 기다려 봐!”
타키온과 2년 넘게 함께 하며 알게 된 건 타키온이 먹을 것을 보챌 땐 그냥 빨리 줘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짐 정리는 우선 미뤄두고 냉장고부터 열었다. 오늘 장을 보려고 했던 터라 재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 있는 거라도 대충 긁어모으고 도마와 칼을 꺼냈다. 뒤에서 느긋하게 콧노래나 부르는 게 얄미웠다.
당장 만들라고 하니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있는 것을 다 썰고, 즉석밥을 넣어 볶고, 케첩 같은 양념을 버무리고. 그릇 위에서 밥 모양을 잡으며 타키온의 눈치를 살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 불안하게 하는 것도 재능이다. 한숨과 함께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자 살짝 묵은 먼지 냄새를 고소한 향이 밀어낸다. 계란을 적당량 붓고 젓가락을 대려던 차에 타키온이 언제 다가왔는지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대충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손님은 손님인데 어떻게 그래. 뭐어, 있는 거 적당히 볶은 거니 대충이긴 해. 오늘은 피드백도 안 받을 거야.”
대화는 받아주면서도 시선은 프라이팬에 고정, 살살 움직이며 젓가락으로 계란을 돌렸다. 얘기하는 사이 꽤 익어버렸는지 회오리가 되려다가 쭉 찢어져 버려서 어쩔 수 없이 내 그릇에 올렸다. 다 됐으면 얼른 달라며 칭얼거리는 타키온을 슬쩍 밀어내며 다시 심기일전. 살살 돌린 끝에 이번엔 그래도 볼만하게 되었다. 그대로 남은 그릇에 올리고, 잘 된 오므라이스를 타키온의 손 위에도 올려주었다. 답지 않게 타키온은 그걸 멀뚱히 바라보았다.
“따뜻하군.”
“그렇지? 방금 막 해서 맛도 괜찮을 거야. 도시락은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앉으라며 식탁 의자를 빼주니 별말 없이 총총 걸어와 앉는다. 왜 갑자기 얌전해졌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게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몫과 소스를 챙겨 식탁에 마주 앉으며 표정을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밥 한 숟갈 먹고는 기분 좋게 웃기까지 한다. 뭐지. 진짜 배고플 뿐이었나.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흐뭇하게 보고 있으려니 눈이 딱 마주쳤다. 기분 탓인지 타키온의 미소가 더 깊게 팼다.
“아카네 군.”
“응?”
“보고 싶던 이를 실제로 봤는데 얼마나 좋은가?”
“콜록!”
내 침에 사레가 걸려 기침이 터졌다. 눈물이 찔끔 나고 삽시간에 얼굴 온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냉수를 들이켜 속을 식히고는 주먹으로 작게 식탁을 내리쳤다.
“술 취한 사람이 한 말 가지고 놀리지 마!”
“호오, 말하는 걸 보니 취했을 때 기억은 있나 보군. 아무튼 대답해 보게. 좋은가, 싫은가?”
“놀리는 건 싫어!”
“놀리는 건? 다른 건 좋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는가?”
“아, 제발! 타키온!”
“아하하! 아, 이럴 때 심박수를 체크해야 했는데 서둘러 오느라 장치를 두고 왔군. 내가 이런 실수를.”
“정말 다행이다, 안 가져와서!”
더는 대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입에 밥을 마구 밀어 넣었다. 이 와중에 볶음밥이 고슬고슬한 게 맛있었다. 배고픈 줄 알았더니 타키온은 먹다 말고 숟가락도 내려놓은 채 턱을 괴고선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이 내 눈, 뺨, 턱을 차례차례 훑고 지나간다. 체할 것 같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못 참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타키온이 낮게 웃었다.
“취했을 때 자네는 고분고분 대답해서 좋았는데 아쉽군. 나중에 자네가 술 마시는 것 좀 보여주겠나?”
“안돼! 담당 우마무스메 앞에서 술 마시는 트레이너가 어디 있어!”
“흐음. 하긴 술이랑 학생이 같이 있는 거니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겠군. 그렇다면 내가 술을 마셔도 괜찮은 시기가 되어서야 볼 수 있나. 이런, 이런. 번거롭군.”
타키온이 술을 마셔도 괜찮은 시기. 번뜩 든 생각에 고개가 빳빳해졌다. 붉은 눈빛을 한 번 받고는 천천히 그를 살폈다. 항상 같이 있어서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함께하는 시간 동안 타키온도 많이 바뀌었다. 약간 차분해진 외관이라든가, 분위기, 언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체가. 실험과 트레이닝으로 쉼 없이 쌓아온 만큼 처음엔 얇아 보이기만 했던 몸도 나름 탄탄해졌다. 처음. 그때가 타키온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였는데 어느새 3년 차다. 그러니 타키온의 나이도 벌써. 갑작스레 세월이 체감되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렇구나. 얼마 안 남았구나. 타키온이 어른이 되는 때가.
“그때가 오면 내가 한잔 사줘도 돼?”
취한 듯이 속내가 입 밖으로 나왔다. 당황한 티가 나지 않도록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술이 싫으면 안 마셔도 괜찮으니까 옆에서 상대는 해줘.”
“흐음. 술이라는 것 자체가 내키진 않는다만. 단 것도 있다고 들었고, 자네가 주는 것이라면 괜찮겠지. 마음대로 하게.”
“단 술에 상대가 너라… 도무지 취할 것 같지 않은 조합이네.”
“뭐라고? 그럼 기껏 상대해 주는 의미가 없지 않나!”
“애초에 그걸 왜 보고 싶어 하는 거야! 난 취한 건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그럴수록 내 호기심이 자극된다는 걸 모르겠는가? 그럼 나중에 도수 높은 술 선물해 주도록 하지! 자네는 내가 주는 건 마셔주니까!”
“선물 예고가 무슨 협박처럼 들리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시덥지 않다 못 해 유치하기도 한 대화를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계란지단을 덮어서 그럴까. 밥은 생각보다도 오래 따뜻하게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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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9,364자
1월 1일. 새해의 첫날. 이런 뜻깊은 날에 트레센 학원 운동장에서 스톱워치를 손에 쥐었다. 날이 날인 만큼 참배를 다녀온 후에는 좀 쉬며 트레이닝 계획을 다시 볼 계획이었으나, 참 기분 좋게 뒤집어졌다. 참배 중에 나타난 타키온 때문에. 눈 내리는 운동장을 호쾌하게 가로지르는 타키온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옛날에는 타키온이 먼저 트레이닝 하러 가자고 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후우. 깊이 내쉬는 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날아간다.
누군가가 들으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타키온은 이제야 출발점에 섰다.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몸을 사린 이전까지와 달리 지금은 플랜A도 성공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이젠 정말로 한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일만 남은 거다. 참 길게 돌아온 만큼 전력으로 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상당히 가파르긴 하지만, 올해는 중거리 G1과 그랑프리 제패를 노리는 로테이션을 짰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계획. 타키온 본인도 동의했고 그의 상태나 자질도 더없이 출중하다. 문제는…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타키온이 골인 지점으로 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스톱워치를 눌렀다.
"후우. 트레이너 군. 이번 기록은 어떻지?"
"응, 오차 범위 안이긴 하지만 방금 전 기록보다도 단축되었어. 오늘 하루 기록 추이를 생각해 보면 단순 우연은 아니겠지. 음, 무척 좋은걸."
"후후, 당연하지. 자, 다음 메뉴를 말해보게."
"날도 춥기도 하니 실내 피트니스 센터로 이동하자. 클래식 때 쌓아온 실적 때문에 앞으로 엄청 마크 당할 테니까. 마군에서도 뻗어 나올 수 있는 파워가 좀 더 있으면 좋겠어."
"좋지. 그럼 이동할까."
"그래."
스톱워치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니 마치 기다린 것처럼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울었다. 배턴터치처럼 그것을 꺼내 드니 상태 바에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제가 이전에 말한 거 생각해 봤나요?]
와작. 갈무리할 틈도 없이 얼굴이 구겨진다.
"왜 그러지?"
"아, 미안. 잠깐 연락이 와서. 먼저 가 있어. 짐 챙겨서 따라갈게."
여상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타키온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앞장서 걸어갔다. 얇게 깔린 눈에 그녀의 발자국이 흐릿하게 새겨졌다. 한 열 발짝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가뜩이나 타키온의 트레이닝 메뉴와 앞으로의 목표로 머리가 아픈데, 애먼 데에서도 날 찌르고 있다.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의에서 벗어나진 않되 사실상 거절인 답장을 보내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처박았다. 대충 짐을 싸서 양손을 꽉 잡자 나도 모르게 힘을 줬는지 손톱이 손 안쪽을 파고들었다.
묵직하다. 비단 짐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타키온은 순조롭다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본래 지닌 재능에 진심으로 트레이닝에 임하며 불씨를 지피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해 가는 타키온을 보며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경기에서 활약하겠어. 약속하지. 네 소원은 이미 성취된 거나 다름없어.」
타키온은 그렇게 선언했다. 그게 허세 같은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새삼스레 타키온의 재능을 체감할수록 내 부족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게 문제다. 트윙클 시리즈는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의 이인삼각. 타키온이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만큼 나 또한 그 속도에 맞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요새 그 사실이 벅차기만 하다. 이 또한 당연하다. 그동안의 나는 트레이너이기 보다는 모르모트에 가까웠으니까. 주니어급과 클래식급 메뉴를 거의 건너뛰다시피 하고, 이제 와서 시니어급을 붙잡고 가려니 자꾸만 헛도는 것 같다. 나는 정말 타키온에게 걸맞은 트레이너가 맞을까. 그 초조함이 타인에게도 보일 정도로. 아, 정말 싫다. 이런 내가. 거의 나 자신을 때리다시피 어깨에 짐을 올리고 허리를 들었다. 타키온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타키온. 조심해서 들어가."
짐을 어깨에 올리고 아카네가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시선은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릎은 반대로 학교 건물을 향한 것을 보고 타키온이 눈썹을 움찔했다.
"자네는 또 트레이너실로 가나?"
"응, 할 게 있어서."
"새해 첫날부터 계속 바로 퇴근하지 않고 트레이너실에 있는 것 같다만."
"연초라 그런지 일이 많아서 말이야. 기숙사까지 못 데려다주는 건 미안."
"그건 됐네. 자네가 멋대로 해주던 거였으니."
타키온은 대충 휘젓던 손을 턱 아래에 갖다 대었다. 해가 바뀌었어도 계절은 여전히 겨울. 아직 해가 짧기에 이제야 기숙사 저녁 식사가 시작될 시간에 학교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타키온에게 있어 어둠은 그저 당연한 시간의 형상에 불과했다. 괴한 정도 가볍게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고, 귀신은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반기는 바다. 그런 그를 통금이 아니어도 어두울 땐 걱정된다며 굳이 데려다주던 게 자신의 트레이너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신을 먼저 보내고 트레이너실에 박힌다니. 하나둘 조명이 켜지자 자연스레 아카네의 얼굴에도 음영이 졌다. 그 그늘로도 차마 숨겨지지 않을 짙은 색을 보며 타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카네 군. 내일 트레이닝은 쉬는 날이었지?"
"응? 응. 맞긴 한데 왜? 피로가 많이 쌓였어? 아니면 혹시 어디 몸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럼 내일 오전 9시까지 역 앞에서 보도록 하지."
"어?"
"그러면 적당히 하고 들어가게."
"잠깐! 그대로 가지 말고 왜 나오라는 건지는 말해줘!"
"…또 무슨 짐 옮기라는 건 줄 알고 기껏 바이크도 끌고 왔는데."
"음? 짐이라면 아마 생길 걸세. 쇼핑하러 가는 것이니."
"쇼핑 가는 거였냐고! 미리 말 안 해줬잖아!"
평소대로 빽 지르려던 목소리가 삑사리를 내며 갈라졌다. 아카네 민망스레 목을 매만지며 헛기침할 수록 타키온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하얀 손이 그 뺨에 닿고, 엄지손가락이 거뭇한 눈 밑을 쓸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손길에 아카네가 표정을 꾸며낼 틈도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소리가 잠겼고, 눈빛도 흐려. 이런, 이런. 어제 내가 적당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무리한 적이 몇 번 있긴 하다만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군. 요즘 잠은 제대로 자는 건가? 졸음운전 한 건 아니겠지?"
"자, 잤어.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보험으로 운전 전에 에너지 음료도 마셨으니 괜찮아."
꿈에서 깨어나듯 아카네가 눈을 깜박이며 타키온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목소리가 찢어진 것보다 제 볼이 뜨거운 것이 더 부끄러웠다. 쇼핑센터 쪽으로 몸을 틀어버리며 아카네는 아까보다 조심히 목소리를 꺼냈다.
"그보다 웬일이야? 너 보통 필요한 건 인터넷으로 사잖아."
"옷이나 생필품 등에 한정하면 말이지.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구색만 갖추되니 굳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어. 하지만 신발이나 편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레이스에서 어떤 것을 착용하느냐에 따라 기록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공연한 사실. 이미 착용감과 레이스의 결과도 확인된 모델이 있긴 하지만 육체와 마찬가지로 상품도 새로이 변화해 가니 기존 것에 만족해선 안 되겠지. 특히 올해는 더더욱. 이에 연초에 미리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서 새로운 모델을 들이고자 하네. 그런 만큼 나 혼자보다는 자네의 시선으로도 보는 게 좋지."
"그런 거면 미리 말해주지. 좀 알아보고 왔을 텐데."
"무얼. 사전 지식이라면 서로 충분히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오늘은 관찰과 체험 위주로 같이 알아보자고 부른 것이니 부담 가질 것도 없네."
"그래도."
"이런, 이런.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닐세. 말하는 걸 잊었을 뿐이지. 그러니 표정 풀게. 가지."
아카네는 자신의 옷소매를 잡아끄는 타키온을 졸졸 쫓았다. 그 뒤에서 몰래 아카네는 타키온이 했던 것처럼 제 뺨에 손을 대었다. 나 지금 타키온이 언급할 정도의 표정이었나. 손바닥 아래에서 볼 근육이 어색하게 움찔거렸다.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웃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접대의 기본은 미소라며 어릴 때부터 누누이 익혀왔으니. 아까는 실수라고 쳐도 지금은 제대로 웃고 있나? 불안감을 밀어내듯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손을 떼니 이미 눈앞에는 운동화와 편자가 가득했다. 생각에 깊이 빠져서인지, 피곤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인지 아카네는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이끌어주던 손이 없었더라면 어딘가에 머리를 박았겠단 생각이나 들었다. 타키온은 가게에 도착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아카네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다정함에 아카네는 손을 맞잡고 싶은 충동을 제 주먹을 꽉 쥐어 참았다.
운동화 재질, 스포츠 공학에 의한 설계, 인터뷰 등에 따른 우마무스메의 후기, 타 트레이너의 조언, 마지막으로 실제 착용감까지. 타키온의 말대로 둘 다 사전 지식은 충분했다. 뻑뻑한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끄집어내는 게 어려웠을 뿐. 타키온이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때마다 아카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고 긴 토의가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빈 손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데이터는 충분히 얻었고 구매는 가격, 배송 등에서 인터넷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보고, 들고, 신고. 그러고선 그대로 나가는 것이 눈치가 보였지만 사장은 친절히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눈빛에 호감이 살짝 어린 것에서 아카네는 단순 겉치레가 아니라 팬심으로 말했음을 알아차렸다. 비단 이 사람뿐만이 아니다. 잘 보니 주변의 시선들이 이쪽으로 몰려있다. 피곤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소곤거리는 대화에는 간간히 타키온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사적인 시간이라 차마 말걸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흔한 팬서비스나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가는 타키온을 보며 아카네는 새삼 그의 인기를 체감했다. 트레이너로서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최근 있었던 일 때문에 입안이 썼다. 이대로 있다간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아카네는 서둘러 타키온의 옆에 바짝 섰다. 반짝거리는 형광이 그의 눈을 찔렀다.
"어, 여기."
"왜 그러지?"
"아, 별거 아냐. 예전에 여기 게임센터에서 너랑 인형 뽑기 했던 게 생각나서. 정확히는 나만 하긴 했지만… 그땐 이제 막 교복 입은 네 인형이 추가된 참이었는데 지금은 종류가 많이 늘어났네."
"아아. 자네가 내 인형 뽑겠다고 난리를 쳤던."
"네가 약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같이 해줄래?!"
"하하! 그건 자주 있던 일인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모처럼 같이 방문한 거니 또 해보는 건 어떤가? 이번엔 약은 없긴 하다만 비교군으로 쓸 수 있을 테니 괜찮겠어."
"그럴까, 온 김에."
딸칵 지갑이 경쾌하게 열리며 아카네가 한쪽에 동전을 쌓아두었다. 비교군으로 쓴다 하였으니 그때와 똑같은 횟수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첫 번째 동전이 달그락거리며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왼손으로 스틱을 움직이고,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른다. 일련의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타키온은 기계 옆에 기대 아카네를 가만히 관찰했다.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자신과 꼭 닮은 인형 하나 뽑겠다고 빛나는 눈을 보는 건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이걸 빛난다고 해선 안 되겠군. 인형 뽑기 창 너머에선 아카네는 인상을 쓴 채 눈을 연신 깜박거리고 있었다. 집게와 인형 사이 초점도 잡지 못한 눈동자가 배회한다. 겨우 인형 하나가 집게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동전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동전을 투입하고서도 집게가 엉뚱한 곳을 내리 찍자 아카네가 인형 뽑기에 이마를 박았다.
"아카네 군."
벌떡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아카네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오늘따라 집중이 안 되네! 하하. 아니면 오랫동안 안 해서 그럴지도. 오늘은 실험 관련으로 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응. 볼일은 끝났으니 기숙사로 돌아가자, 타키온."
아카네는 싱긋 웃어버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먼저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타키온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도 안 하고. 그제야 뒤에서 아카네를 바라본 타키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똑바르던 그의 걸음걸이가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자, 도착."
"아카네 군, 잠시."
"응? 왜?"
타키온은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손짓했다. 바이크도 제대로 안 세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동을 잠시 끄고 타키온에게 향했다. 순순히 내렸으면서 선바이저를 올리지도 않고 있으니 타키온이 내 헬멧을 손수 벗겨냈다. 엉망으로 눌려있던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붕 떠올랐다.
"아카네 군, 바이크는 여기 주차하고 가도록 하게. 외부 차량 주차에 대해선 내가 생활 반장에게 말해두지."
"내 운전이 그렇게 불안했어?
"잘 도착했으니 나쁘진 않았다고 해야겠지. 다만, 뒤에 있는 날 신경 쓰느라 무사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커. 진짜 문제는 이 이후 혼자 운전할 때가 되겠지."
"그래서 두고 가라는 거야?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내 상태가 심하긴 한가보다."
한숨을 섞어가며 웃었다. 타키온이 갖고 가버린 헬멧에 한 손을 올리고, 마치 쓰다듬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렸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금방 가기도 하고, 정 졸음운전이 걱정되면 에너지 음료라도 하나 더 먹고 갈게."
"갖고 다니는 건가, 그걸."
"1+1 행사 상품이었거든."
"전부 마시진 말고 3분의 1 정도만 마시게."
"알았어, 알았어."
바이크 사이드백에 넣어두었던 에너지 음료를 꺼내고, 캔 마개를 땄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물을 몸속에 흘려보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단순 플라시보 효과인지 즉각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며 깨어난다. 실수로 음료가 입가를 타고 새어나갔는지 엄지손가락에 이물감이 닿았다. 휴지가 어디 있더라. 태평스레 캔에서 입을 뗐다.
"어."
빨강. 내 머리카락보다 진하고 짙은 액체가 손에 묻어있었다.
"아카네 군! 고개 숙이게!"
고개가 강제로 꺾였다. 목덜미에 닿은 타키온의 손이 이상하리 만큼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와 타키온 사이에 낀 헬멧에는 붉은 반점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이거 혹시 내 피인가? 머리를 휘젓는 어지러움도, 속이 뒤집히는 울렁거림도 영 내 감각이 아닌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다리 힘이 풀렸다. 몸이 기울어졌다. 헬멧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점멸한다. 타키온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붉은 점이 하얀 어깨에 떨어질 때쯤엔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낯선 천장이다. 웃기게도 이런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맥을 짚고 있는지 왼쪽 손목에서 약한 압박과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내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질문이 날아올 텐데 조용하기만 하니 영 뻘쭘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실험이나 실수가 아니라 순전히 나 스스로 과로하여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이니. 나름 조절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너무 과신했다. 갑자기 끼어든 스케줄 하나 감당 못 할 줄이야. 눈치가 보여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팔로 눈가를 가리니 옆에서 한숨이 떨어졌다.
"요 며칠 무리하는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내 불찰이 커."
"…아니. 이건 순전히 내가 자기관리 실패한 거잖아. 걱정 끼쳐서 미안."
"대체 뭘 그렇게 하는 거지? 이것 참. 내 실험으로 바빴을 때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특별히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냐. 정말 평범한 일. 자료 조사나 트레이닝 메뉴 정비, 일반 트레이너 업무 같은 거."
"그건 이전에도 해오던 거 아닌가. 그런 걸로 이 지경이 된다고?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테지."
"정말 저게 다야."
"아카네 군. 바른대로 고하게."
타키온이 억지로 내 팔을 잡아치우니 곧장 붉은 시선이 나에게 쏘아졌다. 이마를 찌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문 타키온은 처음 봐서 가슴 한 편이 시큰거렸다.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웃고 싶었으나, 내 몸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눈 밑만 파르르 떨렸다. 결국 항복하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그냥… 내가 조금 초조했나 봐. 그래서 좀 오버해 버렸어."
"대체 무엇이?"
"…타키온."
"말하게."
"최근에 다른 트레이너한테 무슨 컨택 들어오거나 한 거 없지?"
"음?"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였는지 타키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없다만?"
"하… 없으면 다행이긴 한데… 당사자 의사도 확인 안 해보고 그딴 말을 했다, 이거지…"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설명이나 하게."
타키온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미적미적 상체만 일으켰다. 시간을 끄는 게 뻔히 보일 텐데도 내 상태 때문인지 의외로 타키온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순순히 말할 때까지 버틸 셈인 거다, 이거. 목이 타서 마른침을 모아 한 번 삼켰다.
"작년 말에 어떤 트레이너가 나한테 네 이적 제안을 했었어. "
"무슨."
"자, 끝까지 들어봐. 일단 그 제안 고민하느라 이렇게 된 건 아니야. 거절은 했어. 당연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난 널 이적 시킬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만약에 네가 네 발로 이적하겠다고 나서도 한 번은 붙들어 볼 거야, 나는."
"흐음? 겨우 한 번만 붙들 건가?"
"그래도 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까… 아, 딴 길로 새게 하지 말고. 아무튼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서 그만."
"그자가 뭐라고 했지?"
"아그네스 타키온은 나 같은 신입 트레이너가 감당할 수 있는 우마무스메가 아니지 않냐고."
참 이상하게도 이 말을 하면서 난 웃고 있었다. 아무리 환히 웃어 보아도 말 자체가 부드러워질 리 없음을 알면서도. 내가 내 입으로 독을 깨문 기분이다. 속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감정이 드러나기 전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진 둑으로는 막아지지 않는다. 잇새로, 손 틈으로 연기처럼 본심이 빠져나간다.
"젠장. 예전에는 괴짜니까 괜히 어울리지 않는 게 좋다고 다들 제멋대로 떠들며 내버려두더니 이제 와서 탐이 나나 보지? 그렇지만 제일 화나는 건."
까드득 이가 갈렸다.
"내가 이딴 말을 들을 정도로 트레이너로서 얕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이 말리며 손톱이 얼굴을 긁는다. 한 번 터진 감정은 주제도 모른 채 부글부글 들끓어 오른다.
"그동안 언론이나 인터넷 댓글이 그런 말을 해도 애써 신경 안 썼는데, 같은 트레이너한테 그딴 평가를 받으니까 주체가 안 되었나 봐. 너무 분해서 뭐라도 조금이라도 더 하려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거야. 그 평가에 스스로 증명을 해버린 셈이지. 나도 나 자신의 어리숙함에 한숨이 나와."
"자네가 좀 서툴긴 하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딱히 날 달래 달라고 한 말은 아니긴 했다. 내가 못 참고 쏟아내었을 뿐, 타키온에게 뭘 바란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에게마저 이런 평가를 받는 건. 힘이 풀려 손이 턱 떨어지며 내 두 눈에 타키온이 비쳤다.
"내가 자네의 첫 번째 우마무스메이니 당연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타키온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붉은 눈동자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어 침침했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착각하지 말게. 그 평가에 대한 증명은 어디까지나 내 레이스로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크큭. 그 평가는 낭설에 지나지 않아. 최근 트레이닝이 순조롭다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렇지만 그건…"
전부 네 재능과 실력이 아니냐는 물음은 중간에 잘라 삼켜버렸다. 지금 그런 걸 재확인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릎을 모아 그 위로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바라도 될까, 타키온에게. 새삼 이러고 있는 내가 참 꼴사나웠다. 그래도 이미 이런 꼴인 김에 조금만 더 부끄러운 짓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욕심은 언어로 피어올랐다.
"…타키온,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 건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
"그래, 물어보게."
"내 트레이닝 메뉴에 불만은 없어?"
"현재로썬 없네. 있어도 피드백하면 바로 고쳐주고 있지 않나."
"모르모트, 아니. 잘못 말했다. 실험 협력자로서는?"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나 최근 들어 연구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지. 그러나 지금 같은 몸 상태는 곤란해. 물론 이런 상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약도 있지만 그땐 내가 따로 요청할 터이니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안 그래도 그건 반성하고 있어. 그러면 내가 트레이닝 외에 각종 생활을 챙기는 건?"
"만족하고 있네. 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건 정말 좋았는데 없어지니 시간 효율이 떨어지더군. 그건 다시 해줬으면 좋겠어."
"하하. 응, 그건 고려할게. 마지막으로 내가 너에게…"
말하던 도중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내 침에 사레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내내 숨겨두던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에 거부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에너지 음료의 카페인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아직도 속이 메스꺼웠다. 서서히 올라오는 토기를 긴 숨을 통해 뱉어내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으니 그 아래에 심장이 쉴 새 없이 뛰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모로보시 아카네가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필요해?"
트레이너, 모르모트, 조수 등. 내가 현재 하는 역할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는 많았다. 그 단어들만 나열해서 본다면 그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트레이너는 많고, 모르모트는 항상 타키온이 알아서 찾아다니고 있으며, 그의 두뇌에 조수는 필수적이진 않다. 나, 모로보시 아카네란 존재 자체가 타키온에게 의미가 있는가.
"필요하네."
타키온은 확언했다. 고민하는 시늉조차 없이. 그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러면 됐어."
그에 나도 짧게 대꾸했다. 다른 사람의 평은 필요 없다. 네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벽에 편히 기대었다. 신기하다. 그 어떤 약이나 에너지 음료를 마셨을 때보다 머릿속이 맑게 갠다. 잠을 자듯 색색 숨을 고르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세웠다.
"…아니다. 타키온, 하나만 더. 부탁이 있어."
"뭐지?"
"약 좀 만들어 줘."
"오? 자네가 의뢰하는 건 처음이군. 그래, 무얼 원하지? 자양강장제? 집중력 향상? 아니면 며칠 밤을 새워도 무리 없는 육체? 뭐든 말해보게! 그동안 모르모트이자 트레이너로서 한 일들을 치하하며 어떤 것이든 특별히 대가 없이 만들어 주도록 하지."
"아니, 아니. 은근슬쩍 네가 하고 싶은 거 끼워 넣지 말고. 아마 너라면 금방 만들어 낼 거야.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니건만, 장난을 꾀하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벌레 퇴치용이거든."
"후우…"
"여어, 카페! 트레이닝을 끝내고 온 건가! 다음 레이스를 앞두고 트레이닝이 연일 이어지고 있던데 혹시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진 않은가? 마침 여기! 카페인을 최대한 배제하여 육체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누적된 피로감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약이!"
"안 마셔요."
"그런가. 뭐어, 이미 2명의 임상실험 결과는 확인했으니 자네에겐 추후 재조정한 것을 부탁하도록 할까."
"그것도 안 마실 거예요…"
오늘도 냉정히 거절하며 자신의 공간에 향하려던 카페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설프게 웃으며 무릎에 덮은 담요를 매만졌다.
"혹시 그 결과라는 게…"
"하하… 안녕, 카페."
나름대로 가렸지만 빛이 담요를 뚫고 나와 살아있는 무드 등이 된 것만 같았다. 심지어 담요 길이가 약간 모자라 발목은 청록색으로 아주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트레이닝도 없는데 이 상태로 다른 데 가기도 그래서… 잠깐 실례하고 있었어."
"괜찮으니 편히 계세요…"
누가 봐도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겐 일상이었다. 카페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하며 자신의 소파에 앉았다. 트레이닝이 꽤 힘들었는지 작은 체구가 등받이에 푹 파묻혔다.
"최근엔 트레이닝하더니 또다시 연구인가요…"
"당연하지! 실험과 트레이닝의 비율만 바꾸었을 뿐, 나의 연구는 계속되네! 아무래도 주위에선 연구가 끝났다고 오해했던 모양이네만. 하하하! 이토록 연구할 거리가 쌓여있는데 그럴 리가 없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타키온이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몸도, 의자도 회전하는데 붉은 눈은 자꾸만 나에게로 향했다. 마주치는 시선은 나도 즐겁지 않냐고 묻는 것만 같아서 그냥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2명 마셨다는 건…?"
"아아, 시시한 모르모트가 하나 더 있었지."
"카페가 오기 전에 가버렸지만."
창밖을 내다보니 나와 똑같이 빛나는 다리가 운동장을 다급하게 가로 질러가고 있었다. 속이 후련해지니 저절로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음, 이번 약 효과가 좋네."
"하하! 친애하는 모르모트 군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니 말이지.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아. 응… 그런 거였구나…"
카페는 '친구'와 대화하는지 허공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나에게 향한 카페의 눈빛은 어쩐지 타키온을 볼 때와 닮아 있었다. 역시 들켰구나. 멋쩍게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니 카페는 잠시간 나를 보다가 커피를 내리려 일어났다. 달그락거리며 내려온 머그컵이 2개. 타키온은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아마도 하나는 내 것. 카페의 친절함과 함께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즐기며 빛나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한 두 주일 동안, 타키온의 트레이너가 다리가 빛나는 채로 병원을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건 내가 아니었지만 정정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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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17,225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붉은 단풍잎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자꾸만 머리에 붙는 나뭇잎을 떼어내며 앞서가는 어머니를 훔쳐봤다. 오비가 허리를 조이고 유카타 때문에 보폭이 좁아 걷기가 불편한데도 어머니는 아주 부드럽게 계단을 올라가셨다. 혹여나 놓칠세라 옷자락을 살짝 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실수로 돌멩이라도 찼던 것인지 무언가가 잘그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단풍나무 뒤로 작은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그 앞에 멈추시더니 내 쪽을 돌아보시기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카네."
"네, 어머니."
"보이니?"
흘끗 어머니 안색부터 살폈다. 어머니께선 손님을 대할 때와 똑같이 온화하신 미소를 걸친 채 어디를 가리키고 계셨다.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어머니의 손끝을 보자 우리 집과 료칸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기와 위에 붉은 단풍이 소복이 쌓이고, 옆을 지나가는 냇물에도 단풍 몇 개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이곳에서 자라오며 수도 없이 보았을 절경을 새삼스럽게 푸른 눈 안에 담았다.
"아름답지?"
"네. 아름다워요."
"정말로?"
"…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니?"
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머니를 올려다보아도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 바로 무릎을 꿇었다. 바닥은 어느새인가 흙바닥이 아니라 다다미로 바뀌어 있었다. 그 위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후드둑 쏟아졌다. 물방울에 닿은 곳이 짙게 변색되어 간다. 절대, 절대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단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를 본다면, 그 얼굴에 어린 실망과 슬픔을 마주한다면 나는 분명 흔들릴 것이다. 까딱 잘못하여 이 수에 넘어가게 된다면 난 어머니가 가꾸신 화원에서 곱게 피어날 거다. 싫다. 그럴 순 없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다. 그러니 제발. 유독 작아 보이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사이에 이마를 박았다.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해 있는데, 너는 이 모든 것을 두고 대체 어디에 가겠다고 하는 거니."
참으로 자상하시며 서러운 말씀이었다. 입을 열었지만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쇳소리만이 내 목을 긁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으셨던 건지, 내 침묵 자체가 대답이 되었던 건지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그래. 말려도 할 거라면 해보렴. 지켜보마. 대신 실패하면 바로 돌아와야 한단다."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머니는 나직하게 덧붙이셨다. 이 말씀이 저주였던 건지, 배려였던 건지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건 단 하나, 그 말을 들은 나는 숨이 턱 막혔다는 것 뿐이다. 하얀 발이 내 옆을 지나간다 싶더니 곧이어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떠난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들이 가슴 속에 응어리졌다.
어머니, 저는 이것들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제가 꿈꾸는 것은 저 멀리에 있습니다. 아무리 억눌러도 이 마음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쫓아가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해보고 싶습니다. 바라시는 딸이 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빈말이어도 좋으니 저를 응원해 주실 순 없으셨나요. 엄마.
"헉…!"
"오!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이번 약의 부작용은 꽤 심했나 보군."
눈을 떴다. 실제로도 땀을 흘린 건지 등이 축축했다. 신음을 흘리며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방금 그건 꿈? 어린 시절의 꿈은 정말 오랜만이다. 한숨과 함께 이마를 쓸어내리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인지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 근육이 다 땅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간 숨을 고르는 나를 타키온이 여느 때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키온…?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어?"
"약 1시간 정도일세. 약을 먹고 고열, 맥박의 상승과 같은 증상 등이 나타나서 일단 눕혔지."
"…나 괜찮은 거 맞아?!"
"예상 범위의 반응이긴 하네. 정 궁금하면 일어나 보게나. 나도 궁금한 참이니까."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우선 상체부터 일으켰다. 그러자 걸치고 있던 재킷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몸에 딱 맞았던 티도 헐렁하게 늘어지기에 붙잡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손이 헛돌았다. 내려다보니 소매가 손을 반쯤 덮고 있다.
"어, 어라? 잠시만. 옷이…?"
"하하하! 얼굴만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그랬군. 이야~ 이걸 성공이라고 해야 할지, 실패라 해야 할지!"
타키온의 웃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부터 소매에서 완전히 빼냈다. 기분 탓인지 평소 보던 손보다 묘하게 작았다. 오히려 꿈속의 나와 크기가 비슷할 정도였다. 덮고 있던 담요를 치우자 하체도 사정은 같았다. 바짓단은 남아도는 데다가 허리가 헐렁해서 일어서기라도 하면 바지가 내려갈 것만 같았다. 분명 내 몸인데도 내 몸이 아니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애꿎은 옷만 꽉 움켜쥐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번 실험은 신체 회복 관련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다만?"
"그렇지만 이건 회복이라기보다는 마치…"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아카네군?"
내 말을 끊어내며 타키온은 내 옆에 앉았다. 갑자기 무게가 실리자 침대가 삐그덕 울었다. 타키온이 나를 발끝부터 머리까지 살피었다. 진득한 시선에 움찔 몸이 굽어진다.
"「다치기 전의 몸 상태」로, 혹은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설마."
"회복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그 옆에서 나는 무력하게 마른침이나 삼킬 수 밖에 없었다. 타키온이 낮게 웃더니 내 손에 손거울을 쥐여 주었다. 그 속에는 누가 봐도 나와 똑 닮은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렇다면 옛날의 몸 상태, 즉 어려지는 것도 회복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키는 나와 같은 159cm고, 체중은…"
"그건 굳이 말로 안 해도 돼!"
"흠, 이 정도면 한 몇 살쯤으로 돌아간 것 같은가?"
"글쎄. 어디 보자… 키가 7cm 줄어든 거고, 내가 중3인가, 고1에 성장이 멈췄으니까 중학교 1학년 쯤일까."
계산하듯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아카네가 문득 행동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 말을 직접 확인하려는지 손거울로 얼굴을 다시 살피기도 했다. 슬쩍슬쩍 움직일 때마다 미처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원래는 머리가 묶었을 때도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데, 이제는 어깨만 겨우 덮고 있었다. 멋쩍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던 아카네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중심을 검지로 콕 찍으며 타키온이 물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 있나?"
"문제야 아주 많지만… 음, 뭐랄까. 보통 영화나 만화 같은 픽션에서 어려진다고 하면 아기나 유치원생이 되던데 지금의 나는 참 애매한 나이가 되었구나 싶어서."
"자네 나이 생각하면 약 10년은 젊어진 건데도 말인가? 욕심도 많군."
"…잠시만. 내 10년 전이 지금 이 모습이라고? 아, 아니야. 10년 전이라고 하면 조금 더 어리고 아기였던 것 같은…"
"그건 한 2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나?"
"그런 사실 굳이 짚지 말아줘! 자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실감했을 때의 충격을 네가 알아?! 너 같은 학생들은 몰라, 이 기분!"
"이런, 이런. 어른의 마음은 잘 모르겠군."
적당히 대꾸하며 타키온은 들고 있던 태블릿에 '약 10년'이란 글자를 적었다. 그 숫자를 노려보던 타키온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펜을 집어넣었다.
"그건 그렇고 약 10년이라니. 신체를 되돌린다는 건 그만큼의 트레이닝 효과도 다시 앗아가는 것이니 약 한 달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만 이건 너무 과하군. 복용량의 문제인가, 아니면 약 자체의 문제인가. 원하는 시기로 맞추기는 생각보다 까다롭겠어."
"그보다 나 돌아갈 수 있어?"
"그럼. 약효는 시간이 지나면 끝나기 마련이네. 더군다나 시제품이니까 말이지. 약 3시간 정도일까. 아니지. 내 생각보다 효과가 세게 나왔으니 반비례해서 일찍 끝날 수도 있겠어."
타키온은 중얼중얼 이번 실험에 대한 평가와 이후 예상을 적어 내리더니 이내 씩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저 미소는 설마. 아카네는 파리해진 얼굴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타키온은 태블릿을 내려놓더니 노트북, 웹캠, 스톱워치 등을 익숙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모처럼 좋은 기회이니 이것저것 측정해 보도록 하지! 두뇌는 그대로인 채 동일 인물의 10년 전후 순수 신체 차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니!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자, 잠시만! 이 꼴로?"
"왜 그러지? 사이즈는 맞는 것 같다만."
타키온이 아카네를 위아래로 훑자 아카네는 떨떠름하게 옷깃을 잡았다. 어려진 탓에 원래 본인 옷은 맞지 않고, 그렇다고 새 옷을 사러 갈 겨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타키온의 예비용 체육복을 빌려 입은 참이었다. 키가 비슷해져서 그런지 타키온의 말대로 사이즈는 맞았다. 사이즈는 맞지만… 아카네가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눈높이가 맞다 보니 태평한 타키온의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와 저지를 꾹 내려 버렸다.
"그… 꼬리 구멍이 신경 쓰여서…"
"그게 문제인가?"
"그게 문제냐니… 아니, 아니다. 너한테 이런 말을 한 내가 바보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아카네는 이마를 짚었다. 상대는 그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잘못 산 인간용 바지도 그냥 입고 다니는. 엉덩이와 가까운 등 부근을 드러내 놓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 우마무스메가 알 리가 없었다. 설사 알아도 배려할 리도 없을 테지만. 아카네는 뒷짐을 지며 뻥 뚫려있는 구멍을 따라 동그라미를 덧그렸다. 브이넥 티는 그대로 입고 있으니 맨살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아카네 본인의 기분과 사회적 체면만이 문제일 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카네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실험의 모르모트, 발광, 모발 색 변화, 담당 우마무스메 대신 달리기 등. 자신의 사회적 체면은 이미 나락에 떨어졌단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꼿꼿하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운동장 써야 하는 측정은 최대한 아무도 없을 때 해줘…"
"흐음? 정 그렇다면 고려해 보지."
적당히 대꾸하며 타키온은 터벅터벅 문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선 타키온은 출발 신호처럼 긴 옷소매를 힘차게 펄럭였다.
"자, 시작할까!"
"형편없군."
"헉… 허억…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콜록, 콜록!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후우우…"
"그렇지만 보게, 이 기록을! 가장 최근의 자네와 비교하면 몇 초도 아니고 몇 배 차이가 나네! 10년이란 세월, 신체적 차이, 그리고 그동안 나와 트레이닝한 것을 감안해도 차이가 너무 커! 이건 과장 보태서 갓 태어난 수준 아닌가!"
"어흑. 그래. 갓 태어난 사람은 일단 좀 앉아 있을게…"
아카네는 숨을 헐떡거리며 타키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갓 태어난 사슴처럼 덜덜 떨렸다. 엄청난 거리를 뛴 것도 아니었다. 평소 타키온이 자주 요구하던 2,000m를 평소보다 느린 페이스로 뛰었을 뿐. 그게 어린 몸에 이렇게까지 안 맞을 줄은 몰랐다. 무슨 인터벌도 아니고 중간중간은 아예 걷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근육을 풀어주려고 다리를 주물러도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기별도 가지 않는다. 근육도, 뭣도 갖추지 못해 볼 품 없는 몸뚱아리. 아카네는 다리를 쭉 펴며 그것을 외면했다. 하늘은 오늘따라 드높기만 했다.
"달려보니까 알겠어.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아무리 많이 쳐도 중학교 1학년인 것 같아. 중학생 때부터는 그래도 육상부 했었으니까 아마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자네 학생 때 육상부였나?"
"응. 딱 부 활동 수준이었지만."
"왜 그런 중요한 정보를 여태 말 안 해준 거지?"
"응? 이거 실험에 필요한 정보 아니지 않아?"
"자네는 나의 제1호 모르모트이지 않은가! 대부분의 실험은 제일 먼저 자네를 통해 검증되니 자네와 관련된 정보는 전부 실험과 관련되어 있네! 정말이지. 자네는 생각보다 본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는 있는가? 아무튼 지금은 그보다."
"흐악?!"
다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아카네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참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어느새인가 쪼그려 앉아 제 다리를 만져 대는 타키온을 보고 또 소리를 지를 뻔했으니.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거침없이 올라오는 손길에 아카네는 확 혀를 깨물고 싶었다.
"확실히 그렇군. 근육이 거의 없어."
"적어도 미리 말하고 만져줄래?!"
"인간은 겨우 이 정도로도 일상생활에 문제없는 건가? 이건 거의 운동을 안 하고 살았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군."
"맞아."
타키온의 손이 떨어진 틈을 타 아카네가 얼른 다리를 접어 올렸다.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양다리를 끌어안으니 자신의 얄팍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가슴께가 울렁거려 팔 사이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볼이 눌리다 보니 나오는 말들은 전부 어눌해졌다. 그 말투는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것과 똑 닮아있었다.
"육상부 들어가기 전까진 운동은 전혀 안 했어. 아마 학교 체육 시간이랑 가끔 집에서 탁구 쳐본 게 고작이었을 거야. 그다지 밖에서 뛰어놀지도 않았으니까."
"왜지?"
빼꼼 눈만 내밀어 보니 곧장 타키온의 시선이 아카네에게 날아들었다. 아주 조금의 악의도 없이 순수한 의문과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어려져서 그럴까. 평소라면 줄줄 나오던 거짓말과 핑계는 어디론가 날아가 있었다. 아카네는 입을 뻐끔거리다 그냥 웃어버렸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모든 감각이 자신이 알던 것과 묘하게 어긋나는 지금도 이 미소만큼은 아주 익숙했다. 그것이 어쩐지 서글펐다.
"…조금만 쉬었다가 말해도 돼? 나 목말라."
"흐음. 그러도록 하게."
아카네를 내버려두고 타키온은 그 옆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렸다. 새하얀 창에 무미건조한 데이터가 늘어서던 도중, 그 위로 붉은 단풍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타키온은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적어도 그의 시야에서는 단풍나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디에서부터 날아온 건지. 단풍잎을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오늘의 날씨 정보를 되짚었다. 벌써 가을도 꽤 깊어졌다. 기온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을 연상시킬 만큼 매서웠다. 이런. 이래서야 몸이 빨리 식어버리겠군. 아카네가 쉬고 싶다고 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타키온은 강경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이만 다음 측정으로 넘어가도록 할까."
타키온이 말을 던졌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침묵을 바람 소리가 메웠다.
"아카네 군?"
타키온이 이름을 불러도 아카네는 멍하니 앉아 허공만 보고 있었다. 불온한 예감에 타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속도를 보아하니 거칠었던 호흡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즉, 지쳐서 저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넋이 나가 있는 듯한…
타키온은 턱을 괴고 그를 조용히 관찰했다. 단풍잎이 붉은 머리 위에 안착해도 그는 미동 하나 없었다. 자신의 트레이너는 한 번 생각에 빠지면 주변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몸이 묶이는 것도, 제 방 창문이 열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럴 때 움직이는 것은 딱 하나, 메트로놈처럼 움직이는 검지 손가락뿐이다. 탁탁 제 손등을 두드리는 박자가 점점 느려지는 걸 보고 있자니 그의 생각을 끊어내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본인의 이야기는 왜 항상 요령 좋게 피해 가는지. 이걸 뒤집어 헤쳐야만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 마음 그대로 타키온이 아카네의 팔을 붙들어 억지로 몸을 돌리자 화들짝 작은 어깨가 튀어 올랐다.
"아카네 군."
"네?!"
"…네?"
아카네한테서 처음 들어보는 한 음절에 타키온이 답지 않은 반문을 던졌다. 항상 올곧게 자신을 보던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가라앉았던 호흡도 점차 거칠어졌다. 신체를 쓰지 않았으니 감정의 문제다. 두려워하고 있나? 무엇을? 이 의문은 아카네의 질문 하나로 해결되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여긴 어디인가요?"
드르륵. 타키온이 연구실의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단단히 쳤다. 너머에선 트레이닝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운동장과 비교한다면 연구실이 유독 조용한 것은 으레 있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침묵은 타키온에게도 꽤 낯선 것이었다. 타키온은 살짝 고개만 꺾었다. 기껏 홍차도 내줬건만 아카네는 입도 대지 않고 얌전히 무릎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자세는 꼿꼿하지만 호기심과 불안감을 감출 바가 없는지 눈동자는 연신 바쁘게 돌아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단순 연기로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니다. 애초에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칠 인물이 아니기도 하다만. 한숨을 삼키며 타키온은 의자를 끌어와 그와 마주 보았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어려져 버린 트레이너와.
"자, 그럼 확인을 위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지.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나?"
"아, 네. 저는 모로보시 아카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어, 학교인가요?"
"틀린 대답은 아니군. 여긴 트레센 학원일세. 일단 알아두고 있게나."
"트레센 학원이라면 설마 그…"
"현재 나이는? 몇 학년이지?"
"아, 만 11세.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흐음. 본인 추측이 딱 맞았군. 그럼 가장 최근 기억은?"
"아마… 달리고 있었는데…"
"어디서, 왜 달렸지? 기억나나?"
바로바로 나오던 대답이 멈추었다. 본인도 당황스러운지 입이 몇 번이고 열렸다 꾹 다물렸다. 타키온이 대답을 촉구하려 눈짓을 하자 아카네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게… 운동장에서, 누가 시켜서… 아마도, 어머니? 아니, 그렇지만 이런 걸 시키실 이유가 없는데… 어째서…"
또박또박하던 말이 횡설수설하게 바뀌고, 올바르던 자세도 점차 무너진다. 결국 아카네는 제 양손을 꽉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자네가 죄송할 필요는 없지. 필요한 답변들이었어. 고맙네."
타키온은 의자를 돌려 아카네 대신 모니터와 마주했다. 다시 검토해도 약은 분명 육체에만 영향이 가도록 조합했었다. 실제 본인에게도 가장 최근의 기억은 남아있는 상태이고. 즉, 뇌까지 어려진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쳐버린 것인가. 타키온은 우선 침착하게 앞서 측정했던 데이터를 컴퓨터로 옮겼다. 현재 데이터와 비교할수록 격차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실험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은 항상 타키온에게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혹시 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걱정이 타키온의 뇌를 장악했다.
곤란하군. 긴 소매가 타키온의 입가를 가렸다. 가만히 있는데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감정적인 동요인가? 내가? 실험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측정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대응이 우선이었다. 약효는 시간이 지나면 끝나기 마련. 타키온은 아카네에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대로 약효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해독제를 만들어 일찍 끝내는 게 나은가. 그렇지만 약효가 끝나기 전에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급하게 만든 해독제가 더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이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는가. 아니, 생각을 계속해서 기억이 혼전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차라리 재워두는 게. 사고를 촉진하려 홍차에 손을 뻗자 시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빛이 걸렸다.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타키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뚫어지겠어."
"앗, 죄송해요. 바쁘신 것 같던데 제가 방해를."
"무얼. 그냥 보기만 한 거 아닌가. 괘념치 말게."
타키온의 의자가 다시금 아카네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카네는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에 푸흐흐 웃음이 흘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담당 트레이너와 동일인이라는 인식은 있다. 더군다나 키가 자신과 같으니 물리적 크기도 그리 작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리다는 실감이 이리 들다니. 만 11세면 스칼렛 군보다도 어린 건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타키온이 느긋이 서두를 뗐다.
"생각해 보니 나만 질문했군. 정작 궁금한 게 제일 많은 건 자네일 텐데도 말이야. 궁금한 게 있다면 편히 물어보게."
"그러면 저, 그 우마무스메 씨가…"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아, 네. 아그네스 타키온 씨가…"
"타키온이라고 불러도 되네."
"…타키온 씨가?"
"그냥 타키온이라고 하게. 자네한테 그렇게 불리는 건 영 어색하니까."
"저, 죄송해요. 남을 부를 때 '씨'를 빼는 건 제가 어색해서…"
"남이라… 하아. 마음대로 하게. 그래서 질문은?"
아까의 자상함은 변덕이었는지 타키온은 손, 정확히는 소매를 휘적거렸다. 달라진 태도에 아카네는 몸을 움츠렸다. 타키온은 조금 뚱해 보이긴 해도 아까처럼 의자를 돌려버리진 않았다. 그럼 물어도 괜찮은 걸까. 분위기를 흘끗 살피다 여태껏 방치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홍차는 미지근하면서도 달콤하고 향긋했다.
"그, 타키온 씨가 지금의 저는 어려진 거라고 하셨었죠? 원래 어른인데 약을 먹고 어려진 거라고."
"그렇지."
"어른인 제가 왜 트레센 학원에 있던 건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이유를 아신다면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건 자네가 나의 모르모트. 아니, 잘못 말했다. 담당 트레이너이기 때문이지."
"네?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제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자 아카네는 합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다고 이미 나간 말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타키온은 의자 손잡이를 힘주어 붙잡았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그야 저는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요."
"흐음?"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타키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업이라. 지난 초여름 잠깐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집이 료칸을 한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거기 주방장이고, 요리를 배웠다고."
"네, 맞아요. 알고 계시는군요. 저희 집은 대대로 료칸을 운영하고 있고, 저는 그 후계자예요. 요리도 그 일환 중 하나고, 지금도 일을 계속 배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른인 저는 분명 료칸에서 일하고 있어야 하는데 트레이너라니. 뭔가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지?"
다소 날카롭게 쏘아지는 말에 아카네가 홍차 잔을 꽉 쥐었다. 잔이 흔들리며 손등 위로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산된 실험조차도 아주 약간의 변수만으로 예상 밖의 결과를 낳기 마련이네. 하물며 더 길게 이어지는 인생이란 필연적으로 무수한 변수를 만나 수도 없이 바뀔 수밖에 없지. 료칸 후계자로 태어났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지금도 당연히 료칸에서 일한다는 결과를 예상하는 건 상당히 편협한 사고라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나의 조건이 필히 확정된 미래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나는 진작에…"
"어… 네?"
"…아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둘까. 아무래도 어린 자네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질문은 없나?"
"음… 저, 그러면…"
물어도 되나. 아까보다 더 가라앉은 것 같은 분위기에 아카네가 연신 눈치를 살폈다. 타키온은 지루한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방향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여러 그래프가 춤을 추고 있었다. 아카네는 료칸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려야 하는 분위기는 잘 알아채는 편이었다.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뒤에서 대기하는 게 직원의 역할이라고 지겹게 들어왔으니까. 머리가 내린 판단은 간단명료했다. 지금 상대방이 나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 거기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사적인 호기심은 접고 일을 하시라며 물러나야만 한다.
하지만. 아카네의 시선이 자꾸만 타키온의 상체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교복 리본을 조이고 있는 편자 모양에. 우마무스메 레이스의 중심. 트레센. 아까 이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얼마나 설렜던가. 우마무스메를 좋아하는 자로서 지금 이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있나? 아니, 못 하지. 아카네는 자문자답을 마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타, 타키온 씨는 여기 트레센 학원의 학생인 거죠?"
"그렇지."
"그러면 레이스에도 나가겠네요?"
"맞네. 이미 데뷔도 한 지 오래지."
"와, 그렇군요! 그러면, 그러면요!"
아카네가 거의 튀어 나갈 것처럼 바짝 몸을 들이댔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덜컹거렸다.
"얼마나 빠른가요?"
탄성 어린 목소리에 타키온이 귀를 바짝 세웠다. 다시금 마주한 눈은 언제 고요했냐는 듯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익숙하디익숙한 빛깔에 타키온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아하하핫!"
"죄, 죄송해요! 역시 무례했죠?"
"아니! 아니야! 오히려 유쾌했어! 잠깐이라도 정말 아카네 군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했던 게 참으로 우스워졌군."
"네…?"
"자네는 참 한결같다는 뜻일세."
타키온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고, 의자가 빙그르르 돌았다. 다소 과장되게 소매가 크게 펄럭이며 양팔이 펼쳐졌다.
"얼마나 빠르냐고 물었지? 흐음. 뭐라 답해줘야 좋을까. 수상 실적, 구간별 기록 등 답변할 거리는 아주 많네! 하지만. 그렇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질문을 한 거니까 역시 답변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라니요?"
아카네가 자신을 따라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타키온이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타키온은 일부러 바로 말해주지 않고 웃음을 흘리며 시간을 끌었다. 금방이라도 발을 동동거릴 것 같은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타키온은 입을 가리며 잠시 진심으로 웃은 다음, 트레이닝용 신발을 꺼내 흔들었다.
"직접 보도록 하게, 내 달리기를"
찰그랑. 운동화가 떨어지며 편자가 유쾌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노을에 푸른 잔디가 단풍처럼 붉은빛이 물들어 있다. 가을이라 해가 짧은 탓에 하늘의 절반 정도는 벌써 남보랏빛이었다. 이 시간까지 트레이닝하는 학생들을 위해 하나둘 조명이 커지고, 그 아래로 긴 그림자 두 개가 일렁이며 나아갔다. 아카네가 몇 번이고 그냥 객석에 있겠다 손사래 쳤지만 타키온은 굳이 운동장까지 끌고 내려왔다. 그러고선 한 손에는 아예 스톱워치까지 쥐여 주는 게 아닌가. 얼떨떨한 아카네를 잔디밭에 세워두고 타키온은 느긋하게 몸을 풀었다. 잔디, 2,400m, 양호. 다소 어둡고 바람이 불긴 하지만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가볍게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편자까지 이상이 없단 걸 확인한 타키온이 검지 손가락으로 아카네를 척 가리켰다.
"거기, 그 자리에서 두 눈 똑똑히 뜨고 보고 있게나."
"네, 네!"
씩씩한 대답에 타키온은 한 번 시원스레 웃고 나서 출발 지점에 섰다. 타키온이 자세를 잡자 웃음도, 장난기도, 여유도 한순간에 그 얼굴에서 사라졌다. 진지한 모습에 지켜보던 아카네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일 정도였다.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후 아카네가 신호했다. 어설픈 구령과 다르게 스타트는 매우 날카로웠다.
'빠르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다. 비교가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그것이 빠른지, 느린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압도적인 스피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빠르다는 인식을 준다. 지금 타키온의 달리기가 그야말로 그러했다. 옆에 달리고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네 입에서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바람도, 빛도 모두 그의 뒤로 넘어가기에 바빴다.
꿀꺽. 아카네가 침을 삼켰다.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를 직접 본 횟수가 적을 뿐, 그도 레이스 영상을 찾아보는 팬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아카네 눈에도 현재 타키온이 빠른 페이스로 움직인다는 게 잘 보였다. 각질이 도주인 걸까? 아니면 이 정도 속도로 선행? 혹시 시니어급인지 진작 물어봤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지금 들고 있는 스톱워치로 실시간 기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도저히 저 달리기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빠른 만큼 지켜볼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윽고 타키온이 제4코너를 돌고 가속을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타키온의 달리는 모습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깔끔한 폼, 길게 뻗어가는 팔과 다리, 호선을 그리는 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눈. 붉은 눈은 어둠이 가라앉은 이 세상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순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더없이 순수하게 광기에 가득 찬 눈빛이 심장에 내리꽂혔다. 그대로 타키온이 결승점을 지나치고, 아카네는 스톱워치의 버튼을 눌렀다.
타키온은 속도를 천천히 죽이며 저 앞까지 간 후에야 겨우 멈추었다. 아직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타키온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한 번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른 타키온은 의기양양하게 아카네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이 마주치자 아카네는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생생히 느껴졌다. 아, 역시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자신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영원히 뒤쫓고 싶어지는 마음을. 어쩐지 울 것만 같아 제 뺨을 가볍게 쳤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아카네는 활짝 웃으며 타키온을 향해 뛰어갔다.
"타키온 씨!"
"잘 봤는가? 감상은 어떻지?"
"정말, 정말 굉장했어요! 뭐라 말해야 하지… 무척이나 매력적이라고 할까… 끌어당긴다고 해야 하나… 보는 내내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거려서… 아무튼 적어도 제가 아는 우마무스메 중에서 제일 빠른 것 같아요!"
"후후, 그런가. 그 눈을 보아하니 좋은 답변이 되었던 것 같군."
"네! 이렇게 굉장한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를 가까이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고…"
조잘조잘 신나게 떠들던 아카네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벙긋거리던 입에선 힘없는 소리가 샜다.
"이런 분의 담당 트레이너라니, 제가…"
"표정이 왜 그러지? 기쁘지 않은가?"
"아, 아뇨! 기쁘지 않다기보다는 실감이 안 나서요. 제가 어려진 게 아니고 그냥 어떤 착오가 있거나 어딘가 이상한 차원으로 와버린 건 아닐까요."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며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가 내려가자 타키온과 똑같은 체육복을 입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아카네는 체육복은 양손으로 구기며 붙잡았다.
"애초에 제가 트레이너가 되었다는 것도 다 꿈속의 이야기 같고…"
"꿈이라."
타키온은 한 번 피식 웃고는 가져왔던 가방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참 뒤적이더니 유리끼리 맞부딪히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꺼내 번쩍 들어 올렸다. 투명한 플라스크 안에는 청록색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자! 그런 자네에게 아주 딱 맞는 약이 있네! 바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지!"
"네?"
"이것만 마시면 트레센 소속 트레이너가 되는 것은 물론, 자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우마무스메를 담당하게 되지! 어디 그뿐일까? 사츠키 상을 포함해 여러 G1 레이스 우승의 영광도 차례차례 자네의 것이 되네! 부작용으로 잠~깐 잠들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애교라고 치게."
"네, 네에?! 아무리 들어도 수상한데요?!"
"믿게."
타키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카네와 마주 섰다. 같은 키를 가진 두 사람의 시선이 어떤 방해물 없이 교차했다.
"나를. 그리고 자네 자신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약 뒤에서 타키온은 나긋하게 속삭였다. 악마에게 홀리듯 아카네가 조심히 플라스크를 건네받았다. 출렁거리는 액체를 보고 있을 뿐인데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막 받아먹으면 안 된다. 그런 정론 따위는 가슴을 울릴 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꾸만 타키온의 달리기를 상기시켰다.
"저는…"
아카네는 약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버리곤 뒷말과 함께 삼켰다. 몇 번 비틀거리다 힘없이 쓰러지는 몸을 타키온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축 늘어진 아카네를 번쩍 들어 올린 타키온은 그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후후후, 자네는 정말 우수한 모르모트야."
봄바람이 벚꽃잎을 싣고 넘실넘실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 4월, 벚꽃이 만개할 때 꽃구경을 떠나는 대신 나는 이 거대한 나카야마 경기장에 몸을 욱여넣었다. 클래식 삼 관의 시작, 가장 빠른 말이 이긴다는 사츠키 상. 중학생도 되었으니 레이스를 보러 가자며 힘차게 나섰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부모님 허락, 교통수단 예매, 그리고 실제 이동… 경기장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해서 그냥 집에 가고 싶어졌다. 어머니 말 들을걸… 눈물을 꾹 참고 인파에 휩쓸려 계속 움직였다.
겨우 산 입장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주머니에도 못 넣고 손에 꼭 쥐었다. 자리를 찾아 겨우 앉고 숨을 돌리자 그제야 경기장이 보였다. 커다란 모니터만 아니었다면 너른 들판이라고 착각했을 법한 잔디밭이 저 멀리 있었다. 분명 인간과 비슷한 크기인 우마무스메들은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어렸을 때 가족들이랑 본 건 경기장이랑 가까운 스탠딩이었으니 이렇게 경기장 전체를 보는 건 처음이다. 멀어서 조금 실망했는데 이건 이거대로 좋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우마무스메 이야기만 하는 것도 어쩐지 신기했다. 1번 인기의 최근 경향, 2번 인기의 인터뷰, 3번 인기를 향한 응원. 갖가지 얘기를 훔쳐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곧이어 아나운서의 힘찬 안내와 함께 우마무스메들이 일제히 패덕에 들어갔다. 거대한 모니터에 비친 면면들은 하나 같이 비장하며 멋있었다. 침묵도 잠시. 스타트와 함께 모두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신나기 보다는 거대한 함성에 기가 죽었다. 그래도 열심히 눈으로 그들을 쫓았다. 모두 깔끔한 스타트. 각 우마무스메들이 자신의 각질에 맞게 거리를 잘 유지하며 레이스를 이어 나가는 것 같다. 경기장까지 오는 길은 길고 길었는데, 우마무스메들은 순식간에 제4코너에 진입했다. 각자 스퍼트를 내며 일렬을 이루었던 무리가 뭉쳐진다. 그 사이를 뚫고 한 우마무스메가 따라붙는 후발 주자들과 격차를 벌린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을 땐 우마무스메들이 연달아 결승전을 통과하고 있었다. 비디오 판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확한 승리. 함성 속에서 1착한 우마무스메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길게 늘어진 소매가 팔랑팔랑 움직일 때마다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흘러넘치는 감동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트레이너 군."
조금 낯선 호칭인데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곳에서 1착을 했던 우마무스메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어라, 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던가? 의문이 들면서도 습관적으로 재킷 깃에 손에 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편자 모양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이건 트레이너 배지. 아, 맞다. 나는 트레이너였다. 그것도 트레센 소속인.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잊고 있었지? 자문에 답할 틈도 없이 어느새 그 우마무스메가 눈앞까지 와있었다. 승부복용 백의가 크게 펄럭이고, 옷에 달린 플라스크 모양 장식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타키온."
자연스럽게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그는 싱긋 웃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으음…"
"오!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눈을 떴다. 또 꿈이었나. 어린 시절 꿈 자체가 오랜만이었는데, 그걸 하루 만에 연달아 꾸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타키온은 이번에도 옆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몸이 꽤 개운하길래 지체 없이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타키온…?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어?"
"약 1시간 정도일세."
"어라? 이 대화 어쩐지 기시감이… 어, 옷도…"
"약효가 풀리고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어쩔 수 없네. 체육복이어서 그나마 그 정도지."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내 몸부터 살폈다. 일단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는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옷소매나 바짓단이 내 몸보다 짧아 손목, 발목이 드러나 있다는 정도일까. 타키온이랑 체격 차가 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몸에 꽉 끼거나, 옷이 늘어나진 않으니. 그나저나 잘 빌려 입긴 했는데 내가 입은 걸 돌려줘도 되는 건가. 세탁하고 돌려주면 괜찮은가. 혼자 속으로 끙끙거리는 것도 모르고, 타키온이 태블릿을 들고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아까와 달리 몸은 살피지 않고 시선은 얼굴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 그럼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나?"
"모로보시 아카네고, 여긴… 네 연구실이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그리고 자네와의 관계는?"
"타키온이잖아. 아그네스 타키온. 그리고 관계는… 일단 정석적인 답변은 트레이너와 담당 우마무스메지."
"호오, 정석적인? 다른 답변도 듣고 싶다만."
"그건 차마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뭐, 상관없지. 그럼 가장 최근 기억은?"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예상과 달리 타키온은 대답을 보채지도 않고 날 빤히 보기만 했다. 시선을 흘려보내며 약간의 심술을 부렸다.
"…어느 우마무스메한테 넘어가서 이상한 약 먹은 거."
"그렇게 말하면 모르네. 정확히 어떤 약이었는지 잘 생각해 보고 말하게."
"이상한 우마무스메라는 말은 신경도 안 쓰는구나…"
이마를 짚자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차르륵 흘러내렸다. 머리 길이 역시 원래대로 돌아와 얼굴은 물론 상체까지 가려졌다.
"하아… 꿈을 이뤄준다는 약이라니 대체 뭐야."
"아하하! 다행히 어려졌을 때 기억은 다 있나 보군. 참고로 말해두네만 그건 필요한 조치였어. 기억이 더 혼전 되기 전에 막아야 했으니."
"그런 것치고는 어린 나랑 꽤 길게 얘기하던데? 무엇보다 꿈을 이뤄준다니, 뭐니… 어린애 놀리는 것도 아니고."
"흔치 않은 기회니 얻을 정보는 얻어야지. 그리고 내가 딱히 거짓말한 건 아니지 않나."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 시절 내가 꿈꾸던 것과 지금의 나는 상당히 다른 걸."
아차. 너무 답지 않은 말을 해버렸단 자각이 올라왔다.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며 일부러 익살스럽게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런 모르모트 신세가 될 거라곤 어린 나는 꿈에서도 몰랐겠지."
"하하! 그때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진 거라 하게! 가장 가까이에서 우마무스메의 한계를 돌파하는 일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자네도 들으면 분명 좋아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에이, 설마."
"아니, 분명."
타키온의 손끝이 내 턱에 닿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할 바도 없이 확신에 가득 찬 타키온을 마주하니 기껏 자아낸 미소에 쩍 금이 간다.
"나이도, 신체도, 말투도 다 달랐지만 이 광기 어린 눈빛만은 닮아 있었거든."
누가 누굴 보고 하는 소리인지. 광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볼멘소리를 꾹 참았다. 아까 나만을 위해 달릴 때와 똑같은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꽤 버거운 일이었다. 태연한 척도, 가벼운 농담도 이 앞에선 부릴 수 없다. 몸을 뒤로 물려 버려도 타키온은 개의치 않아 하며 웃었다. 내가 진짜 도망칠 리 없다는 걸 잘 안단 듯이.
"그런 눈을 한 주제에 료칸 후계자라니 뭐니 가당치도 않지."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있는 거잖아."
힘 빠진 목소리로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어린 나를 직접 마주한 상대한테서 더 도망치는 것도 우스웠다. 그리고 어차피 내 이야기해 주기로 했었고. 어깨에 힘을 빼는 사이 타키온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출한 건가? 생각해 보면 자네가 본가로 돌아가는 것도 잘 못 봤군."
"아니, 그 정도까진 안 갔어. 너한텐 말은 안 했지만 본가에도 몇 번은 갔었고."
"그러면?"
"고집부린 게 아슬아슬하게 통했다고 할까… 트레이너 전문 양성 학교에 들어가는 것까진 어떻게든 허락을 받았어. 대신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돌아오란 조건이 붙긴 했지만."
"흐음. 그래서 그렇게 절박했던 건가? 관계가 형성된 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처음부터 수상한 약 3개를 먹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 말이야. 아하하!"
"뭐어… 그렇다기보다는 그땐 좌우지간 이런 우마무스메를 그냥 보낼 순 없단 생각이었지만 말이야."
스카우트 때가 생각나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타키온을 살폈다. 그때에도, 내가 어려졌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타키온은 생글생글하기만 했다. 내 시선을 느끼고선 타키온이 눈을 끔벅였다.
"왜 그렇게 보지?"
"뭐랄까…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서. 보통은 내가 원래 가업의 후계자였다는 소릴 들으면 아깝다든가, 어리다든가,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든가. 대충 그런 소릴 듣거든."
"그건 그들이 자네를 잘 몰라서 한 소리겠지."
"응?"
"자네는 참 한결같이, 광기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선택도 기꺼이 저버리고 불길로 뛰어드는 자이지 않나! 자네다운,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네만?"
"…그거 욕이야?"
"칭찬일세. 이런 모르모트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래…"
"무엇보다."
타키온이 짐짓 다리를 꼬더니 무릎 위에서부터 제 다리를 천천히 손으로 쓸었다. 이윽고 하얀 손이 발목과 발등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자네가 없었다면 이런 현재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구나. 응. 그렇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때는 본인조차 포기하고자 했으나, 기어코 클래식 전선을 뚫고 온 다리를. 너는 이걸 나와 함께 이뤄냈다고 하고 있다. 나는 널 통해 꿈을 꾸고 있던 건데. 네 비밀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그저 가족들에게 받고 싶었던 지지를 너에게 풀었을 뿐인데. 이렇게 비겁한 애정으로 과분한 결과를 받아도 되는 걸까. 울컥 속에서부터 뜨거운 게 올라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자네 우나?"
"아, 안 울어! 그냥 이런 적이 처음이라 조금 감성적으로 되었다고 할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잠시만. 너 지금 뭐 해?"
"모처럼이니 심박수를 체크해 두는 걸세. 고작 손가락 하나이니 신경 쓰지 말고 뭔 생각했는지나 계속 말해보게."
"신경이 안 쓰이겠냐고… 진짜 별거 아니고. 좀 부끄러운 소리이긴 한데."
"서론이 길군. 얼른 말해보게."
"말할 테니까 좀 기다려!"
빽 소리를 질렀지만 덕분에 진정이 좀 된다. 목을 가다듬고 신중히 말을 골랐다.
"내 꿈이나 가업 얘기 나왔을 때 긍정적인 반응이 온 건 처음이구나 싶어서. 정작 나 자신조차도 그러질 못했으니까."
"흐음?"
"어린아이의 기세로 뛰쳐나오긴 했지만 후회 정말 많이 했거든. 원래 트레이너를 하던 가문도 아니고, 이쪽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으니까. 내 얘기 잘 안 하고 다닌 것도 가업이나 하란 소리에 제대로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였어."
내가 생각해도 꼴사나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나와버린걸. 자존심과 오기, 약간의 열정으로 여기까지 온 셈이지. 그 답답한 집에 내 발로 다시 돌아가서 '그럴 줄 알았다'는 소릴 듣는 것만은 죽어도 싫었거든. 무아지경으로 뛰어오다 보니 이렇게 됐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는 나보고 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게 멋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이랬다.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앞뒤 재지 않고 전력으로 도망쳤을 뿐. 가만히 옆에 개어 놨던 재킷을 무릎 위에 올렸다. 깃에 달린 트레이너 배지는 이젠 새것 같은 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사이 많은 것을 이루며, 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구나. 그런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 것이다. 참으로 촌스럽고 꼴볼견이게도. 모를 때에는 어쩔 수 없지만, 알아버렸다면 정면으로 마주해야겠지. 눈을 감아버렸던 것들과. 잠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타키온."
"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심장 박동이 불안정해졌다만."
"내가 사실 네 비밀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쩔 거야?"
네 다리 문제를 내가 눈 감고 있었다면. 잔잔하게 덧붙이며 양손을 모았다. 이건 용서를 바라지 않는 고해성사다.
"그랬었나? 언제, 어떻게 알았지?"
"월계배 때. 다른 출전자들 정보 정리한 적 있었잖아. 그때 네 정보도 다시 정리해 보다가 눈치챘어."
"그런가. 하긴 그때 내 태도가 바뀌기도 했고, 카페의 말도 있었으니."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각오했던 분노나 원망은 한 자락도 없었다. 타키온은 내 심박수나 계속 보고 있기만 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바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끄, 끝이야?"
"끝이냐니.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아, 그렇지. 그때 당시 감정이 어땠는지 알려주면 좋겠군! 내가 내 비밀을 폭로할 때 울었던 자네니까 최초의 감정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지 궁금하네."
"아니, 아니! 잠시만! 또 연구하려고 하지 말고! 뭐랄까, 뭔가 더… 다른 말이 나와야 하지 않아? 그렇잖아. 나는 트레이너인데도 나는 네 부상 위험을 방치한 셈이라고? 건강이나 컨디션 문제는 따라달라고 부탁까지 한 주제에. 보통이라면 트레이너 실격 사유 아냐?"
"우리한테 '보통'이란 말이 통한 적이 있던가?"
태연자약한 태도에 긴장이 탁 풀렸다. 힘없이 트레이너 배지만 꾹 쥔 채 벽에 기대었다.
"…아니."
"한 보 양보해서 자네 말이 맞다고 치지. 그러면 트레이너에게 신체적 결함을 숨긴 내가 먼저 담당 우마무스메 실격 아닌가? 자네는 왜 알고도 계약 해지를 하거나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지?"
"그건… 화가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손으로 네 달리기를 끝내고 싶지 않아서, 네가 네 선택으로 나아가는 길을 끝까지 보고 싶어서…"
"흠, 그러면 그 당시 느낀 감정은 분노와 죄책감인가. 조금 미안한 짓을 하긴 했군. 그래도 결과론적으론 잘되지 않았는가. 후후, 여기서 만족하기에는 앞으로 갈 길이 한참 멀었다만."
다소 즐거워 보이는 낯으로 타키온은 내 손가락에서 맥박측정기를 제거하고는 그대로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약속한 대로 한계의 '끝'까지 데려가 줄 테니 계속 따라오기나 하게."
"하… 하하하! 응, 그거라면 자신 있지."
망설임도, 두려움도 모르는지 뻔뻔스레 나온 말에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순수한 광기에 물든 눈빛은 스카우트 때와 똑같은데도 어쩐지 이 애도 좀 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포시 타키온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자 타키온이 그대로 잡아당기며 날 일으켜 세웠다. 두 발이 바닥에 닿고 두 다리가 단단히 날 지탱한다.
"…고마워, 타키온."
"뭐가 말인가?"
"그냥, 말하고 싶어져서."
내뱉고 나서야 뒤늦게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 지금 분위기에 휩쓸려 엄청 부끄러운 말 많이 하지 않았나? 어디 덴 것처럼 타키온한테 잡혀있던 손을 팍 떼버리고 양 볼을 감쌌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별말을 다 한다, 진짜! 무슨 약 후유증 있는 거 아냐?"
"안 그래도 그 관련으로 말하려던 참이네! 약효가 생각보다 셌으니 돌아온 상태도 확인해 봐야지. 자, 얼른 일어나게! 신장, 체중, 혈액 등 기초 정보를 다시 측정하도록 하지!"
"아, 알겠어."
입고 있던 저지가 답답하여 재킷부터 걸쳤다. 습관대로 배지를 한 번 만지고 일어나니 그제야 어두컴컴해진 창밖이 보였다. 오늘도 또 통금 아슬아슬하게 들어가게 생겼다. 후지에게 조금 있다가 연락하기로 하며, 제일 먼저 신장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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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5,316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오니 하늘만큼 공기 역시 차가워졌다. 묵직한 온기를 등에 싣고 아카네가 바이크 엑셀을 힘껏 당겼다. 안 그래도 어두운 거리를 헬멧을 쓴 채로 보는 건 쉽지 않지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길이라 몸이 습관대로 나아간다. 곧이어 똑같이 생긴 건물 두 채가 나타나고, 그 중 '릿토 생활관'이란 입구 앞에서 아카네가 브레이크를 잡았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진동과 매캐한 연기가 아주 잠시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타키온, 도착했어."
"음, 고생했네."
"아, 가기 전에 하나만."
"뭔가 용건이 남았나?"
"응. 아, 그런데 타키온한테는 아니야."
타키온한테는? 헬멧을 벗으며 타키온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아는 아카네는 여기서 헬멧도 벗지 않은 채 인사한 뒤 바로 가곤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헬멧까지 벗고 안장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사이드백에서 웬 봉지를 꺼내기까지 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타키온은 집요하게 관찰했다. 제대로 주차하지 않았으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볼 일은 아니다. 봉지는 마트 로고가 새겨져 있으니 아마 높은 확률로 생활용품. 그러한 정보는 너무나도 쉽게 보이면서도 이런 사소한 것에 왜 이렇게까지 머리가 굴러가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저 당장 눈앞에 있는 담당 트레이너의 시선을 따라갔다.
늦은 시간이라 기숙사에서 불이 꺼진 곳도 꽤 되지만 1층만큼은 아직 환한 빛이 가득했다. 거기에 어떤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후지 키세키. 릿토 생활관의 생활 반장. 통금 시간이 가까운 지금, 그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트레이너가 그에게 간다는 게 문제였다. 후지는 한 손을 여유롭게 흔들며 그들을 맞이했다.
"타키온이랑 타키온의 트레이너 씨. 왔구나."
"안녕, 후지. 필요하다는 거 이거 맞아?"
"응. 고마워, 타키온의 트레이너 씨! 그리고 미안해. 번거롭게 했네."
"아니야. 천만에. 평소엔 이쪽이 번거롭게 하고 있잖아. 정말 별거 아니지만 그 답례라고 생각해 줘."
"이게 무슨 상황이지?"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아직도 주차된 바이크 옆에 서 있던 타키온은 짐짓 팔짱을 낀 채 둘을 보고 있었다. 입구 쪽이 밝아서인지 눈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스포츠 드링크 분말 떨어졌단 얘기를 채팅방을 헷갈려서 잘못 보냈거든. 그런데 사다 주신다고 하길래."
"평소 신세 지는 것도 많고, 어차피 우리 것도 사야 했으니까 괜찮아."
"평소 둘이 따로 연락 같은 걸 하는 건가?"
"네가 지내는 기숙사 생활 반장인 데다가 네 생활을 서포트해 주잖아. 그래서 가끔 연락해."
"하하. 지금 데려다주고 있으니까 통금 조금 넘어도 봐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매번 미안…"
"흐음…"
타키온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아카네의 눈동자가 잠시 방황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 때 나오는 신호라는 건 아는데 그 무언가가 뭔지 도통 짚이지 않았다. 도움을 구하듯 후지를 봐도 그는 가벼이 웃으며 어깨만 으쓱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볼일은 끝났으니까. 목 인사만 건네고 아카네가 타키온 쪽으로 돌아가자 그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그 사이 두 개의 그림자가 그들 옆에 늘어섰다.
"어라, 모로보시 트레이너?"
"어? 키류인 트레이너, 안녕하세요. 미쿠도 안녕."
"안녕하세요…"
그림자 끝엔 키류인 트레이너와 해피 미쿠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는 이들의 등장에 타키온에게 향했던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멀어져 간다. 그 다음엔 아예 몸까지 돌아간다. 꼬리처럼 흔들리는 붉은 포니테일을 타키온 잠자코 지켜봤다.
"모로보시 트레이너도 담당 우마무스메 배웅해 주려고 오셨나 보네요."
"네. 키류인 트레이너는 평소보다 늦게 들어가시나 보네요."
"네. 오늘은 미쿠가 추가 트레이닝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마무리하고 나니 이 시간이 되어버렸어요."
"오늘… 힘냈어요…"
"후후, 열심히 했구나. 키류인 트레이너도 고생하셨어요. 저도 이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태워다 드릴게요."
"크흠."
헛기침 소리가 대화를 끊어냈다. 세 명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타키온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싱긋 곱게 접혀가는 눈이 도통 예사롭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게, 아카네 군."
"응? 어, 응."
"미쿠도 오늘 고생 많았어요. 내일 봐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키류인 트레이너, 먼저 타세요."
"와아,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할게요."
키류인이 먼저 바이크 안장에 올라가고, 아카네는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째서인지 뒤통수가 자꾸만 따끔거려 냉큼 헬멧을 썼다. 아까까지 타키온이 쓰던 헬멧은 자연스럽게 키류인에게로 넘어갔다. 엔진 소리와 함께 배기구에서 매캐한 매연이 뿜어져 나오고 바이크가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큰 도로에 진입하기 전인데도 아카네는 사이드미러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익숙한 실루엣을 훔쳐보다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야, 이야~ 자네는 여전히 방법 의식이 부족하군 그래."
"타키온?"
커튼이 크게 출렁인다 싶더니 그 뒤에서 갈색 머리가 먼저 툭 튀어나왔다. 숨바꼭질하던 어린아이처럼 타키온은 얼굴만 빼꼼 내밀곤 집안을 살폈다.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아카네가 사용 중이던 헤어드라이를 내리고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타키온에게는 그저 눈길 한 번 주고 근처에 둔 스마트폰이나 들어 올렸다.
"이젠 놀라지도 않는군."
"한두 번이어야 놀라지… 일단 잠시만."
"뭐 하는 건가?"
"디지털한테 연락. 갑자기 룸메이트가 사라지면 당황하잖아. 타키온… 여기 있어… 좋아, 전송."
"흐음…"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타키온은 베란다 창에 기대어 섰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밤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일렁였다. 아카네는 스마트폰을 침대에 대충 던진 후, 부엌 쪽으로 발을 옮겼다. 타키온의 눈동자가 붉은 머리카락을 따라갔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아카네가 냉장고를 열려다 말고 타키온을 한 번 뒤돌아봤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들어와. 그래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오늘 아침 자네의 컵에 살~짝 약을 넣었거든. 헤어지기 직전까지 변화가 없는 건 확인하긴 했지만, 혹시 몰라 최종 확인차 들렸다만. 이런, 이런. 이 시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건가. 유감이로군!"
"언제 그런 짓을 했어? 적어도 미리 알려줘!"
"알려줘야 하나?"
"당연하지! 내가 안 먹… 안 먹을 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게. 안 알려줄 때도 있는 법이라고. 미리 말했다가 단순 폴라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면 실망스러우니까."
"하아, 일단 부작용 같은 건 없으니 다행이긴 한데…"
대꾸하는 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카네가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따르고 젓는 모습을 보며 타키온은 꿋꿋하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등과 머리카락에 가려 무엇을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조용해졌나 싶을 때쯤엔 전자레인지가 경쾌하게 띵 울렸다. 아카네가 전자레인지에서 머그잔을 꺼내고 한참을 젓더니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자."
마치 네가 받으러 오라는 것처럼 아카네는 방 중앙에 서서 컵 하나를 내밀고 가만히 서 있었다. 컵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타키온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 이내 베란다에서 벗어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손을 뻗자 자연스럽게 컵 손잡이가 손안으로 들어왔다. 온기와 함께 달큰한 향이 피어났다.
"갑자기 뭔가?"
"따뜻한 우유. 꿀도 탔어. 솔직히 실험 때문에 온 거 아니지?"
아카네는 자신의 몫을 홀짝이며 책상 의자에 앉았다. 눈으로는 식탁 쪽을 가리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얘기는 들어줄 테니까 돌아가면 바로 씻고 자."
"흐음. 자네는 정말 남 챙기는 게 몸에 배어있나 보군. 후지 군도 그렇고, 해피 미쿠의 트레이너도 그렇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싶더니 혹시 그거 때문이야?"
"글쎄. 그때 느낀 감정을 단순하게 따져보자면 부정적인 쪽에 가깝긴 하겠어. 모르모트, 즉 담당 트레이너가 사적으로 다른 것을 챙긴다는 걸 본다는 게 썩 유쾌하진 않더군."
"허어…"
아카네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검지손가락으로 머그잔을 톡톡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자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키온은 여전히 선 채로 아카네의 말을 기다렸다. 그사이 한 모금 먹은 우유는 꽤 달았다.
"있잖아, 내가 왜 창문 안 잠가두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뜬금없는 질문에 타키온이 컵에서 입을 뗐다. 아카네는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방법 의식이 없어서 그런 게 아냐. 네가 이렇게 종종 여기로 찾아오니까, 혹시 네가 찾아올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열어 두다가 자기 직전에 창문 잠그는 거야. "
"나 때문이라고?"
"응."
"그래서?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뭐지?"
"하아. 그래, 이 정도로는 못 알아듣겠지…"
아카네는 머그잔을 감싸 쥔 손에 이마를 작게 콩콩 박았다. 새로 보는 행동 양상에 유심히 관찰하러 타키온이 가까이 다가가자 아카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우유의 열기가 옮아간 건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아무래도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할게.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아까까지 머그잔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꼿꼿히 세우고 아카네는 선언했다. 그러고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우다다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매일 식사를 챙겨주는 것도, 여차하면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널 돌봐주는 애들이랑 연락하거나 챙겨주는 것도, 혹시 몰라 잠들기 전까지 방 창문을 안 잠그고 있는 것도 전부 너 때문잖아. 즉, 네가 중심에 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애들 도와주는 건 부수적인 거야. 알겠지?"
말을 끝맺고선 아카네는 우유를 술처럼 들이켰다. 얼마나 다급하게 마셨는지 입술 위에 하얀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타키온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짐짓 부루퉁한 목소리를 냈다.
"…해피 미쿠의 트레이너와 친하게 지내는 건?"
"동기는 좀 봐줘!"
아카네가 빽 소리를 지르자 타키온은 호쾌하게 웃었다. 아카네는 그 모습을 잠시 어이없이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말하고 나니까 나도 내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네가 걱정되어서… 아니, 아니지. 이건 핑계지. 응. 아무래도 주변인들이랑 연락하는 건 좀 꺼림칙하지? 그 외에도 이것저것 좀 자제해야…"
"아니, 괜찮으니까 편하게 하게."
"너는 사양이라는 걸 좀 해!"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뭐?"
싱긋 웃고 있는 타키온과 당황한 낯의 아카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타키온은 그 얼굴 앞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피며 말하기 시작했다.
"약을 먹는 것도, 검증이라며 몸을 혹사하는 것도, 그 외 네가 말했던 것들도 다. 자네가 다 받아주고 있지 않은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궁금할 정도로."
"…그러니까 잠시만. 너는 지금 내가 과하게 널 챙기는 게 결국은 나 때문이라고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다 받아주니까 네가 더 요구하는 거고, 그에 나도 더 과하게 되는 거라고?"
"그렇지."
"아니, 아니. 잠시만. 그중에 상당수는 네가 먼저 나한테 요구한 거고…"
"거절할 수도 있는데 안 하지 않았나?"
"그, 건…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러려면 네가 중요한데 너는 널 돌보지 않으니까, 나는…"
"하하하! 이거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 같군!"
아카네가 당황하여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타키온은 웃으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들고 있던 머그잔은 어느 사이인가 책상 위, 아카네가 쓰던 컵 옆에 놓아둔 상태였다. 절반 정도 남은 우유에서는 아직도 옅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카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파면 팔수록 말려드는 건 자신이다. 누구와 달리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감정 정도는. 아카네는 결국 또 눈을 질끈 감았다.
"타키온! 옷도 안 갈아입은 채로 침대에 눕지 마!"
"그러면 옷 갈아입으면 괜찮은 건가? 적당히 자네 옷 아무거나 꺼내서 주게."
"자연스럽게 여기서 자고 간다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피곤해서 이대로 자고 싶다만."
"안 돼! 돌아가!"
"어른이 쩨쩨하게 굴지 말게나!"
"어른이니까 하는 말인 거야! 이건 못 받아줘! 돌아가라면 돌아가!"
아카네가 팔을 잡아당기자 타키온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만연한 채로. 아카네가 질린단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니 타키온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어쩔 수 없지. 이만 돌아갈까."
"그래. 꿀 탄 우유 먹었으니까 양치 잊지 말고."
"알겠네, 알겠어. 자네 말이 참 많군."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아카네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타키온은 사뿐사뿐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트레이너 기숙사에는 불 켜진 방이 꽤 많았다. 그 때문인지, 단순히 도시여서 그런지 밤하늘에는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현달만큼은 또렷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타키온이 가만히 달빛을 받다 잠시 뒤를 돌아보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아카네가 태연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 타키온."
"그러지. 아, 맞다."
"응?"
히죽. 타키온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아카네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내일은 함박 스테이크가 먹고 싶네."
"함박 스테이크? 으음, 아마 재료가 없을 텐데. 모레나 글피에 해줄…"
"그러면 부탁하네~"
"못 한다니까!? 저기?!"
아카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타키온은 손을 흔들며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다급히 베란다로 나가자 누가 우마무스메 아니랄까 봐 타키온은 벌써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카네는 베란다 난간에 빨래처럼 늘어졌다. 반박은 안 받을 테니 해오라는 거겠지. 벌써 내일 왜 자기가 부탁한 게 없냐면서 뭐라고 할 타키온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매주 식단표 짜고 재료 사서 요리하는 사람의 정성도 모르고, 이 녀석. 아카네는 괜히 주먹으로 난간을 통통 두드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새벽에 일어나서 재료부터 사야 하니 조금이라도 일찍 자야만 했다. 타키온이 아주 잠시 누웠던 침대에 몸을 눕히곤 아카네는 눈을 감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서툰 저 아이의 어리광을 들어 주자고 읊조리며.
다음날 도시락에는 어김없이 함박 스테이크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피망도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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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글은 극장판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을 기반으로 작성되어 해당 작품에 대한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극장판을 보지 않으신 분께서는 해당 글을 읽는 것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최강의 정의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8,329자
잊을 수가 없다. 타들어 가는 노을 아래로 그보다도 더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던 너를. 턱까지 올라온 숨을 고르지도 않고 너는 내 이름을 있는 힘껏 외쳤다. 붉은색만이 가득하던 그때 네 두 눈만은 광기가 어려 푸른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모든 곳을 이곳에 묻어두고 가려던 나에게 너는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나를 부르고, 나의 의사를 확인하고, 너의 최선을 선보였다.
「내가 너의 『담당 트레이너』가, 너의 『협력자』가 되게 해줘!」
마지막 빛을 태우는 태양도, 내 약 때문에 황록색으로 발광하는 네 다리도 모두 네 눈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꼴을 한 채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스카우트나 레이스를 모두 거부한 내가, 떠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망발을 내뱉은 그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네가 내민 손을 나는 기꺼이 잡았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끝'을, 내가 보여주지, 모로보시 군.」
꿈을 꾸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비웃을 허무맹랑한 꿈을. 지금까지처럼 혼자가 아니라 너와 함께.
"그러니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선 정말로 유감을 표한다네, 아카네 군."
나는 말했다. 이에 너는 울었다. 이미 다 으스러진 발등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으며. 별 소용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너는 듣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알고 그 결과를 목도해도 최소한의 조치만은 끈질기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다 큰 어른임에도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억지를 부리며 우는 모습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게 퍽 우스웠다. 그런데 웃음은 나지 않았다. 발끝에 자꾸만 닿는 눈물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어쩔 수 없이 설탕을 가득 쌓은 찻잔에 뜨거운 홍차를 부었다. 몇 번 티스푼으로 저은 뒤 한 모금 마셨음에도 설탕이 덜 녹았는지 달지 않았다.
책상 위 작은 TV에서는 현실도 모른 채 사람들이 즐겁게 다음 일본 더비를 예상해 보며 떠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내 얼굴이었다. 사츠키상 당시의 레이스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며 홍차에 설탕을 2,3개 더 넣었다. 곧이어 같은 클래식급 우마무스메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포켓 군, 단츠 군, 페리 스팀 군. 유감스럽게도 카페는 다음 더비에 출전하지 않지만 이후 국화상 기대주로서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다. 아카네 군이 붕대를 감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다리를 앞뒤로 느리게 흔들었다.
"자네와 내가 보고 싶었던 그 '끝'은 아마 저 애들이 보여주겠지. 과연 어떨지 참으로 기대가 돼! 그동안 자네가 날 보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야~ 꽤 두근거리는군, 그래!"
"아니야."
울음에 젖어 어그러진 목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발 위로 눈물이 후드둑 떨어졌다.
"달라. 너랑 나랑은…"
그야 자네와 나는 인간과 우마무스메이니 다르겠지. 할 말이 쭉 생각났지만 홍차를 마시며 잠시 뒷말을 기다렸다. 배려가 무색하게 아카네 군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들기만 했다. 울고 있어서 그런지 눈빛이 무척이나 탁해져 있었다.
"만약 내가 말렸다면 달라졌을까."
"자네는 내가 뭘 숨기고 있었는지 모르지 않았나. 무엇보다 자네가 뭘 한다고 해도 내 다리 상태가 변하는 것도 아니지. 괜히 착각하지 말게. 이건 내가 판단해서 내린 선택이야."
"…응. 그렇지. 그래도…"
너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감던 붕대를 고정하고, 잠깐 내 발등 위에 이마를 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기도하듯이. 앞머리 때문인지 발등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슬쩍 발을 뒤로 빼려 하자 너는 구태여 발을 붙잡고 신발을 신겨 주었다. 숨을 길게 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가 꼿꼿하게 일어났다. 눈가가 붉지만 않았다면 울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태연해 보였다.
"곧 병원 예약 시간이야. 가자."
"정말 번거로운 일을 하는군, 자네는. 나는 당장 데이터 분석에 바쁜데도 말이지."
"내일 출주 무기한 정지 관련해서 기자회견도 있고, 건강이나 컨디션 정도는 내 말을 들어달라고 했잖아. 난 네 트레이너야. 아직은…"
"알겠네, 알겠어. 그런 표정 하지 말게."
의자에서 내려와 서자 너는 자연스럽게 다친 발 쪽에 섰다. 유난은. 이제야 웃음이 나오길래 낮게 소리 내 웃었더니 너도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플랜B의 전망은 밝다. 사츠키상에서 유의미한 잔광도 남겼고, 그 빛을 따라올 우수한 우마무스메들도 있다. 이대로 가면 된다. 이대로, 끝을 향해… 네 팔을 붙잡고 한 발짝씩 내딛기 시작했다. 아직도 발등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로 유감이야, 타키온."
너는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올라간 서류 한 장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열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그런지 글자가 영 흐리게 보였다. 그런데도 딱 4글자만 또렷하게 보였다. 계약 해지. 어려운 한자도 아니건만 그 부분만 한 획, 한 획 시선으로 덧그리며 읽었다. 느리게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상처를 입은 발을 제외하면 오늘도 몸 상태에 이상은 없을 텐데도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건 복수인가?"
"아니야! 나 널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 이렇게 된 거엔 내 책임도 있고…"
"그렇다면 죄책감 때문인가? 어이, 어이. 그만두게. 그깟 감정 하나 때문에 우리의 목표를 놓아버릴 셈인가? 착각하지 말게. 레이스 출주를 멈춘 거지 실험은 끝나지 않았어! 여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를 생각하게! 이제 와서 나에게서 떨어지겠다는 생각은…!!! "
"타키온!!!"
귀에 비명 같은 이름이 꽂히고, 어깨가 꽉 붙잡혔다. 고개가 앞뒤로 흔들린다 싶더니 어느샌가 네가 바로 코앞에 와있었다. 나도 모르게 격앙되어 있던 건지 거친 숨이 네 얼굴을 덮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눈동자만큼은 나를 담고 있었다. 이전만큼 빛나진 않아도 한없이 올곧게. 말을 고르는 건지, 울음을 참는 건지 너는 입술을 한 번 지그시 깨물고 나서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진정해. 일단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죄책감이 있단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계약 해지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야. 네가 퇴학 권고 받았던 거랑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돼."
"내 퇴학 권고? 아. 아아, 그런 건가…"
"출주를 무기한 정지한 것이지 은퇴는 아니라면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학원 측도 바보는 아니야. 레이스도, 트레이닝도 하지 않고 있는 우마무스메의 담당 트레이너라니. 그냥 둘 리 없잖아. 지금까지 담당으로 남아있을 수 있던 것도 최대한 배려를 받은 거야."
"그렇겠지. 그 회장은 나 때에도 그랬으니."
"그렇지만 이제 한계야. 학원 측은 나에게 담당 우마무스메와의 계약 해지랑 트레센 학원과의 계약 해지 중에 선택하라고 했어. 정말,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가능하면 계속 네 담당으로서…"
너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올곧던 눈도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또 우는 건가. 가만히 관찰했지만 너는 끝끝내 참아냈다. 울음을 목울대 너머로 넘기고, 입꼬리를 힘껏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미안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눈은 반달처럼 곱게 접혀있었지만, 그 위의 눈썹은 팔(八) 자로 처져 있었다. 너는 버틸 때 이런 표정을 하는 건가. 입을 벙긋거렸다가 네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그럴 계절이 아닌데도 손끝이 찼다. 한 번 힘주어 그것을 잡았다가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뭐어… 서류 하나로 끊어질 사이는 아니니까, 나와 자네는. 실질적인 조수 일은 계속해 주길 바라는데 가능한가?"
"가능해. …그렇게 말하고는 싶지만. 현실적으로 조금 힘들 것 같아. 우선은 학원의 트레이너로 남아있긴 해야 하니까 당분간은 이쪽 업무에 충실해야만 해."
"…새로운 우마무스메라도 스카우트해야 하나?"
흐르듯 질문이 나왔다. 너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숨과 함께 답변을 내놓았다.
"교관 트레이너 한 명이 임신 및 출산 휴가로 하반기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그 대타 일을 하게 될 거야. 가능하면 당분간은 담당 우마무스메를 맡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학원 측이 제안해 주더라고."
"G1 우마무스메를 배출한 트레이너에서 일반 수업을 하는 교관 트레이너가 되다니 엄청난 강등 아닌가?"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새로운 우마무스메를 스카우트하는 것도 실례니까. 애초에 내가 명예니, 뭐니 따지는 편도 아니고. 아무튼 이런 상황인데 이해해 줄 수 있어?"
"하나하나 묻지 말게. 이해라면 했어. 내가 아무리 괴짜라고 불려도 담당 트레이너가 학원에 쫓겨나는 걸 지켜보기만 할 무뢰한은 아닐세. 한동안은 약물 실험보다는 데이터 분석이 우선될 것 같으니 자네가 없다고 해도 실험에 큰 타격이 오는 것도 아니야."
"알았어. 그럼 학원 측에는 내가 말해둘게."
"그래."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렸다. 구겨진 서류를 손으로 밀어 펴고 볼펜을 들었다. 아그네스 타키온. 이름 옆에 서명하고 서류를 넘기자 너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고작 한 장짜리 서류를 한참 쳐다보더니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대로 너는 뒤돌았고, 나는 구태여 배웅하지 않았다. 들고 있는 홍차를 티스푼으로 계속 휘저어도 설탕이 도무지 녹지 않았다. 이런 용해도보다 많이 넣었나. 이런 실수를. 가라앉은 설탕을 떠보는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타키온.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뭐지?"
"기다릴게."
달그락. 다소 뜬금없는 소리에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돌리니 네가 아직 나가지 않은 채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창문에 걸어 놓은 썬 캐쳐 때문에 네 얼굴 위로 프리즘 빛이 번졌다.
"아주 조금이라도 다시 달릴 마음이 든다면, 우리가 보고 싶었던 그 '끝'을 직접 보고 싶어진다면 바로 나를 찾아와."
"자네는 참 미련한 구석이 있어."
"알아. 그래도 기억해 줘."
너는 웃었다. 위태롭고도 아름답게. 푸른 눈을 똑바로 뜨고 내 기억 속에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너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다시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서류를 든 손은 등 뒤로 감춘 채 너는 느리게 몸을 틀었다. 닫지 않은 문으로 손이 흔들리며 사라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달렸다. 도쿄 레이스장을 벗어나 앞뒤 재지 않고 그저 빠르게. 각막에 새겨진 레이스 장면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며 뇌리를 태웠다. 뒤늦게 끓어오른 욕망과 질투, 그리고 본능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미 망가진 지 오래된 발과 거짓말만 내뱉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움직인다. 달릴 수 있다. 달리고 싶다. 그 끝을 보는 것은 나여야만 한다. 나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이 0만 아니라면!
도심의 풍경이 빠르게 내 뒤로 넘어갔다. 항상 이 정도 속도로 선발 주자와의 간격을 유지하며, 동시에 후발 주자들을 견제했다. 상대, 마장 상태에 따라 최적의 위치를 잡고 잠시 숨을 고른다. 눈앞에는 코레마사 다리가 길게 뻗어있었다. 마지막 직선. 그래. 여기에서. 발로 힘차게 딱딱한 아스팔트를 박찼다. 잔디도, 더트도 아니기에 충격이 고스란히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강타했다. 이것이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사츠키상 때의 나는 이것보다 더 빨리 달렸다. 내가 원하는 끝은 이보다 한참 더 앞에 있다. 멀어져 가는 환상을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닿지 않아도. 힘껏 주먹을 쥐었다. 미처 자르지 못한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점점 속도를 올릴수록 바람이 거세게 온몸을 때렸다.
다리를 다 건넌 순간 발을 멈추었다. 제대로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2,400m를 돌파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해냈다. 이 거리를. 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스트레칭도 없이 오랫동안 굳어있던 몸을 끌고 나왔더니 피로감이 몹시도 묵직했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와 고개를 들고 거친 숨을 골랐다. 늦가을 하늘이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자동차 매연 냄새, 그리고 약간의 물 냄새가 났다. 땀이 기화되어 내 체온을 빼앗고, 생리적 현상으로 몸이 떨렸다.
"굉장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어느 사이인가 바로 옆에 검은 바이크 한 대가 서 있었다. 탑승자가 헬멧 바이저를 올리자마자 보인 것은 예상대로 푸른 눈동자였다. 너는 허겁지겁 헬멧을 벗고 산발이 된 머리를 드러냈다. 노을보다도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너…"
"다급하게 따라오느라 타임을 정확히 잴 순 없었지만 바이크로 아슬아슬하게 쫓을 정도였어! 아, 그래도 이 다리 시작점부터는 타임을 재봤는데 그 기록이…"
"왜 여기에 있지?"
말을 끊어버린 내 질문에 너는 눈을 끔벅이기만 했다. 그러다 이내 상기된 얼굴로 씩 웃어버리는 게 아닌가.
"기다린다고 했었잖아."
잊을 수 없는 그때가 지금 네 위에 겹쳐졌다. 시간도, 계절도, 상황도 모든 것이 다 달랐다. 딱 하나, 광기가 어려 푸른빛으로 산화하는 네 눈만이 똑같았다.
"음, 이래서는 기다린 게 아니라 찾아온 게 되지만 아무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응?"
"나는 분명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고 했었어. 트레이너였던 자네에게만큼은 내 몸 상태를 알려주기도 했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네만은 내 레이스 복귀가 요원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나. 설사 회복해서 복귀한다고 해도 이전과 같이 달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 그런데도 어째서 날…"
"그래도 달리고 싶지?"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며 너는 바이크에서 내렸다. 바이크 사이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스포츠 드링크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받아서 들었다. 산 지 꽤 되었는지 미지근했다.
"나도 똑같아. 네가 달리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야."
"겨우 그런 걸로…"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해?"
네 목소리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너는 지척까지 다가오더니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톡톡 닿는 손길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레이스 성적이 어떠하든, 기록이 어떠하든, 세간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나에게 있어 『최강의 우마무스메』는 여전히 아그네스 타키온, 너야."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을 무력하게 들었다. 너는 몸을 살짝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눈밖에 없었다. 그 위로 답지 않게 멍한 내 모습이 비쳤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 '끝'을 넘어서는 걸 보고 싶어. 물론 너만 괜찮다면."
광기에 물들어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목이 메 입을 벙긋거렸다. 끝끝내 나오는 것은 웃음이었다. 배를 붙잡고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심박수를 재보지 않아도 귓가에 심장 소리가 선명하여 평소보다 빠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너는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너와 내가 만나 대체 무슨 반응이 일어난 걸까. 그리고 이것을 너는 무엇이라 부를까. 당장 나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을 쭉 늘어놓다가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우선 지금 할 게 따로 있지 않은가.
"모로보시 아카네 군."
익숙한 이름을 몹시 오랜만에 입에 담았다. 쥐고 있던 손을 네 앞에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선연했다.
"다시 한번 내가 자네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자네의 『꿈』이 되게 해줄 건가?"
너는 웃었다. 시원스레 소리까지 내면서.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까지 맺힐 정도였다. 너는 가만히 숨을 고르더니 내 손 위에 네 손을 겹쳤다. 손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무슨 소리야? 이미 오래전부터 너는 내 꿈인걸."
"타키온!!!"
날 부르는 외침에 번뜩 눈이 떠졌다. 네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자 덮고 있던 담요가 미끄러지며 붕대 대신 하얀 양말을 신고 있는 발이 드러났다. 일순 사고가 멈췄다.
"실험 중에 억지로 깨워서 미안해. 하지만 어쩐지 상태가 이상해서… 괜찮아? 119 부를까?"
"너는…"
"앗, 혹시, 설마…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아그네스 타키온이고, 그리고 여긴… 연구실이군."
"가장 최근 기억은?"
"재팬컵을 보고…"
"재팬컵? 국화상도 출전하기 전인데? 꿈에서 봤어?"
"…꿈?"
벼락같은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발에 들러붙던 고통도, 코끝에 감돌던 물 내음도 아직도 생생했다. 실험으로 말미암아 내 무의식이 꿈에서 발현되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세세하고 생생하다.
"꿈이란 말인가? 그게?"
"타키온?"
내 안색을 살피는 너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앉아 있었을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고, 네 몸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네가 반사적으로 팔로 침대를 짚었을 땐 서로의 이마가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지근거리에서 네 눈을 살펴보았다. 울지 않아 눈가가 붉지도 않았고, 눈빛이 탁해져 있지도 않았다. 그런 낌새 하나 없이 당황스러워 연신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 하늘을 닮은 눈은 여전히 청명했다. 목소리에 열감과 웃음이 섞인다.
"…잠깐 달리고 오지."
"뭐?! 갑자기? 자, 잠시만! 기다려!"
네 팔 아래로 몸을 뺀 뒤 근처에 있던 신발에 대충 발을 꿰어 넣고선 그대로 창문을 넘었다. 뒤에서 몇 번이고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그대로 달렸다. 아래로 쭉 내려가자 트레이닝 때 쓰는 운동장이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스카우트를 받은 날 달린 곳도 이 운동장이었다. 그날의 기억과 꿈속의 감각을 현재와 비교하며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다르다. 그 어느 때와는. 언제 발이 부러질지 알 수 없어 오는 불안감도, 이미 으스러져 달릴 때마다 찔려오던 고통도 없다. 오로지 스피드에 대한 쾌감만이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주마등처럼 익숙한 학교 풍경과 함께 지난 실험과 검증들이 내 뒤로 지나간다. 그래, 플랜A는 기어코 성공했다. 그 여름날, 푸른 바다 앞에서, 너와. 0에 가깝던 가능성은 확정된 현실을 가져왔다.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럼에도 내가 목표로 하는 '끝'은 저 앞에 있다. 아직도 닿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이 정도는 되어야 쫓을 마음이 드는 법 아니겠는가! 마지막 코너를 지나 직선 구간이 보이자 힘껏 지면을 박찼다. 내 발 모양대로 땅이 음푹 패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기세 그대로 속도로 승화된다.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몸에 가해지는 부하를 기꺼이 맞았다. 플랜 A의 전망은 밝다. 내 육체도 보강되었고, 그걸 증명할 레이스도 남아있다. 당장은 넘어설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 조금만 더. 힘껏 손을 뻗었다가 골 지점을 지나는 순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조금씩 속도를 죽이며 차츰 숨을 골랐다. 체감상 2,000m에서 2,400m 정도를 뛰었을까. 타임을 재보진 못했지만 마지막 스퍼트나 남은 체력 등 몸을 풀지도 않고 움직인 거치고는 꽤 나쁘지 않다. 허리에 손을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가을 태양은 여름을 잊지 못했다는 것처럼 쨍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굉장해!"
아주 당연하게 따라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붉은 머리를 꼬리처럼 휘날리며 달려온 너는 내 바로 옆에서 거친 숨과 말을 번갈아 뱉었다.
"헉… 다급하게 따라오느라 타임을 정확히 잴 순 없었지만… 허억… 미안, 잠시만. 후우… 딱 보기에도 엄청난 속도였어! 네가 그렇게 뛰는 건 처음 봐… 아, 그래도 마지막 직선 구간만은 타임을 재봤는데 그 기록이…"
"아카네 군은."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자 너는 입을 곧바로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에 웃음기가 올라왔다.
"정말로 한결같군."
"…칭찬이야? 욕이야?"
"아하하! 뭐든 상관없지 않나!"
"앗! 교복 입은 채로 누워버리면 어떡해!"
잔소리 따윈 신경도 쓰지도 않고 운동장에 드러누웠다. 실험으로 누워있는 동안 백의도 벗어두고 있었기에 팔, 다리에 잔디가 직접 닿아 간지러웠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잔디 냄새도 퍽 괜찮았다. 안구가 건조해져 눈을 의식적으로 깜박이고 있을 때 시야에 불쑥 뭔가가 들어왔다. 스포츠음료인가. 결로 현상으로 맺혀있던 물방울이 볼 위로 톡 떨어졌다.
"자."
"아아, 고맙네."
상체만 일으키고 음료를 받았다. 그 와중에 언제 챙긴 걸까. 방금 막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시원했다. 뚜껑을 따고 몇 모금 마시는 그 일련의 과정을 너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갑자기 왜 뛴 거야?"
"별거 아닐세. 갑자기 달리고 싶어져서 말이지."
"그런… 평범한 우마무스메 같은…"
"나는 언제나 우마무스메였다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순간 깨달았다. 꿈속의 내가 다시 달린 이유, 지금의 내가 기어코 플랜A를 강행한 이유는.
"그래, 나는 우마무스메지."
네 말이 맞았다.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하진 않다. 내가 우마무스메고, 달리기를 향한 본능과 마음이 날뛰는 이상 달릴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친다. 살짝 눈꺼풀을 덮었다. 아까 꿈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달려서 그런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맥박이 그대로 나타나는 위치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아카네 군?"
"아니… 열이라도 있나 해서. 이마는 네가 만지는 걸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이 목으로라도 재보려고."
"자네 은근히 날 보는 시선이 너무하지 않나?"
"새로운 실험 약 먹고 자다가 갑자기 눈물 흘리고선 뛰쳐나가잖아. 걱정할 만하지. 으음. 이 정도면 그냥 달려서 난 열인가?"
너는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다가 손을 내 목에서 떼고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타키온, 오늘 실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응?"
"그러지."
"그렇게 말하지 말고. 건강이나 컨디션은 내 말을… 응? 어? 뭐?"
너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내가 손을 잡자 곧바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치마를 탁탁 털면서 보니 하얀 치맛단에 초록 물이 베어져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한 번 기지개를 쭉 켠 후 짐짓 허리에 손을 얹었다.
"자네 말대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어. 으음, 달렸더니 출출하군. 뭔가 달콤한 것이라도 먹으러 갈까! 자, 안내하게."
"내가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럼! 자네 말고 나를 누가 데리고 간다는 건가! 자, 자!"
"아, 알겠어. 일단 갈 데 찾아볼 테니까 그사이에 씻고 옷 갈아입고 와."
"번거롭군. 그냥 가면 안 되나?"
"너 지금 땀 엄청나! 그냥 이대로 식게 둘 수도 없고 안 돼! 제대로 쿨링 다운하고 나갈 준비 해!"
"아니지. 굳이 나갈 필요 없이 자네가 직접 만들어서 주면 되지 않은가!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달콤한 걸 만들어주게. 디저트나 홍차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해도 괜찮으니."
"내 번거로움은 상관없어?! 그보다 쿨링 다운이랑 샤워는 하고 와!"
웃음을 흩뿌리며 달아나자 곧바로 달음박질 소리가 뒤에 따라왔다. 그것이 몹시 흡족했다. 인간인 네가 계속 따라올 수 있도록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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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4,127자
"아카네군이 생각하는 『최강의 우마무스메』는 무엇인가?"
꿀꺽. 약물이 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사레가 안 들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입에 댔던 플라스크를 타키온에게 돌려주었다. 실험일까, 사담일까. 당황한 나머지 약물이 입가로 약간 새서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물었다.
"꽤나 갑작스럽네. 어떤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무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말해주게. 최근 『최강』의 개념이 꽤 다양하다는 걸 새삼 체감해서 말이지."
"아아. 최근 최강이라는 말 자주 들려오긴 하지. 포켓도 그렇고, '트윙클 스타 클라이맥스' 발표도 있었고."
사담이었구나. 조금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이번 약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몇 분이 걸린다고 했으니 예열이 필요하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습관대로 뉴스 페이지에 들어가니 여기저기 '트윙클 스타 클라이맥스' 관련으로 가득했다. 한껏 들뜬 표정의 오토나시 기자님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를 반겼다.
트레센 학원이나 레이스 관련 단체가 아닌 언론사가 주도하는 대회, 통칭 클라이맥스. 미디어 측은 『최강』의 우마무스메를 『가장 안정적으로 강한 우마무스메』라고 정의하겠다며 리그전 레이스를 개최했다. 미디어가 주도하여 많은 주목을 이끌고 그만큼 외부 환경에 대한 영향, 레이스의 변화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우리도 처음엔 흥미가 있었다. 다만, 레이스에 다수 참가해야 하는 만큼 연구 시간과 육체에 무리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서 포기한 대회였다. 다수의 언론사가 참여하는 만큼 가만히 있어도 얻을 수 있는 자료가 많기도 했고. 당장 지금도 참여 의사를 밝힌 이들의 인터뷰가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실시간 SNS도 아니고 뉴스를 따라잡기 힘든 건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다니 미련이라도 있는 걸까. 금방 끓어 어느새 꺼진 전기포트를 들고 찻주전자, 찻잔 2잔에 어느 정도 뜨거운 물을 부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너머로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의중을 알 순 없었다. 반달처럼 접힌 눈과 호선을 그리는 입은 언제나처럼 같았다.
"그래서 자네 의견도 들어보면 좋을 것 같더군. 아카네 군은 모르모트나 트레이너뿐만 아니라 나의 조수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자네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재미있는 발상을 가져다줄 때도 있으니."
"음, 역시 '최고 속도가 제일 높은 우마무스메'일까."
"뭐야, 생각보다도 더 뻔한 답변이 왔군."
"뻔해서 미안하네."
눈썹을 찌푸리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덜컥 소리가 크게 나며 그 안에 것들도 같이 흔들리며 쓰러졌다. 볼펜, 가위 같은 게 아니라 찻잎만 있다 보니 요란스럽지는 않았다. 주섬주섬 정리하며 제일 앞에 있던 걸 들어 보이자 타키온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좋은 찻잎이 들어와서 얼른 마셔보고 싶다더니. 하여간 타키온의 말은 그대로 들으면 안 된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끌리는 대로 다즐링을 꺼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있었으면 말해주면 안 되는 걸까. 찻잎을 올려놓고, 차 우릴 물을 다시 전기포트에 올렸다.
"흐음. 좋아. 이 경우에는 답변 자체보다는 그 이유가 더 중요하겠지. 한 번 말해보게."
"우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더니 풀이 과정도 묻는 문제였어…"
찻주전자와 찻잔에 있던 뜨거운 물을 천천히 버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티스푼은 잠시 컵 받침에 기대어 놓고, 각설탕 통을 그 옆에 두었다. 절반 정도 남아있지만 단 한 잔에 천천히 녹아 모두 사라져 버릴 테지. 각설탕 통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잠시 말을 정리했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레이스 종류란 참 많지?"
"그렇지."
"전기와 더트. 단거리, 마일, 중거리, 장거리. 중앙, 지방, 프리 스타일… 거기다 매일 바뀌는 날씨에 참가자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지."
그 순간 전기포트가 탁 꺼지며 물이 다 끓었음을 알렸다. 조금 식도록 입구만 열어두고 찻주전자에 찻잎을 딱 덜어냈다. 그 위로 물을 천천히 부어내자 향이 먼저 코를 간질이고 붉은 물이 시야에 올라왔다.
"같은 레이스란 이 세상에 없어. 오직 그 순간뿐이야."
뚜껑을 덮고 바로 타이머를 맞췄다. 3분. 어딘가에는 희비가 이미 엇갈리고도 남을 시간. 초조하게 줄어드는 시간을 바라보다가 타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타키온은 다리를 꼰 채 한 쪽 다리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그 끝에 걸친 신발이 초침처럼 까딱였다.
"그렇다면 그 한순간에 얼마나 높은 고점을 찍는가.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론 기왕 하는 거 1착 하는 게 좋지만."
"흐음~ 아무래도 내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긴 하다만… 나쁘지 않아! 마침 오늘 시험도 자네가 말한 최고 속도 관련이니 성심성의껏 임하도록."
"네, 네. 이따가 열심히 할게."
찻잔과 각설탕 통을 먼저 타키온 옆에 두니 타키온은 즐거운 표정으로 각설탕을 가득 쌓기 시작했다. 하나, 둘… 수를 세어 보려다가 모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나저나 우마무스메 팬들이 들으면 밤낮없이 토론할 거리를 정말 가볍게 묻는구나."
"그런가?"
"인터넷에선 툭하면 나오면 얘기거든. 거기서 미디어 측이 클라이맥스를 개막하며 아예 그들의 의견을 선전하니까 덕분에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말이 오가고 있어. 하물며 너도 물을 정도잖아."
때마침 타이머가 울렸다. 거름망을 치우고 타키온 잔부터 채우니 각설탕이 살근살근 녹아간다. 높이가 낮아질 때마다 각설탕이 더 추가되는 건 눈을 질끈 감으며 무시했다. 내 잔을 마저 채우고 천천히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이번 약은 어쩐지 비릿했어서 차향이 입안에 감도니 한결 낫다. 따뜻한 게 들어가니 속이 편안해진다. 차가 넘실거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레이스에서 '만약'이라는 말은 금물. 그렇다곤 하지만 자꾸 상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특히 보기만 하는 사람 입장에선 '만약'이란 것에 거슬릴 것도 없고. 새로운 자극을 바란다면 나보단 그쪽이 더 나을 거야."
"흐음. 세간의 의견은 아무래도 좋다만… 참고는 되려나. 대세 의견은 무엇이지?"
"글쎄.… 너무 의견이 분분해서 하나로 좁히긴 힘드네. 일단 내가 말한 '최고 속도가 제일 높은 우마무스메'는 생각보다 주류 의견은 아닐 거야. 그래봤자 골문을 제일 먼저 넘지 못한다면 진 거라는 반박이 들어올 테니까. 보통 최강이라고 한다면 어느 레이스에서, 누구와 대결했을 때 1착 했느냐를 따지는 편이지."
"나로서는 그다지 공감할 수 없는 의견이로군."
"나도 그래. 아무튼 그만큼 의견이 다양하다는 거지. 정 흥미가 있으면 내 주변 사람들 의견이라도 모아다 줄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아. 홍차를 한 모금 더 먹으려다가 탄식과 함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아니다. 내 주변은 거의 트레이너니까… 결과가 상당히 편향되겠네."
"흠. 트레이너들도 각자 지향점은 다를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지. 당장 눈앞에 있는 자네도 그렇고. 예상되는 답변이라도 있나?"
"트레이너로서 모범적인 답변은 역시 『본인의 담당 우마무스메』지."
툭 대답하면서 찻잔을 살며시 기울였다. 수면 위로 내 얼굴이 비치려다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레이스 성적이 어떠하든, 기록이 어떠하든 상관없어. 트레이너라면 자신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스카우트와 트레이닝을 하니까."
"흐음.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인가?"
홍차에서 시선을 떼고 붉은 시선을 마주했다. 입꼬리는 분명 올라가 있다. 그런데도 어쩐지 미소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은 오롯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의 압박이 느껴져 입이 저절로 열렸다.
"너…"
대답하려다 말고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태도는 고압적이지만 그 내용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런 거에 순순히 어울려줄 정도의 어른은 또 못 되어 일부러 눈썹을 찌푸리고 볼멘소리를 냈다.
"가장 빠른 우마무스메가 이긴다는 사츠키상을 무패로 달성한 데다 라스트 1펄롱 10초 8을 기록을 달성했으면서 그런 걸 물어? 이걸 두고 약하다고 하면 남들은 그걸 기만이라고 해."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지 않나! 기회를 줄 테니 다시 답변해 보게."
"…혹시 처음부터 듣고 싶은 대답이 그런 거였어?"
"다 큰 어른이 그런 거 따지지 말게나! 자, 빠~알~리! 빠~알~리!"
기가 차서 헛숨을 뱉었다. 타키온이 서툴게 어리광을 부리는 건 종종 있던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대답을 촉구하는 건 또 처음이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달그락. 우선 들고 있던 찻잔부터 손에서 놓았다. 타키온이 이럴 때마다 나도 참 유치하지만 맞받아치듯 투덜거리곤 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살짝 틀자 타키온은 손뼉까지 치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린애랑 이러는 꼴이 새삼 우스웠다. 그래, 내가 져주자. 거기다 애가 칭찬 좀 듣고 싶다는데 해줘야지. 잠시 허공을 보다가 몸을 살짝 숙여 타키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타키온이 순간적으로 웃음을 멈추었다.
"나에게 있어 최강의 우마무스메는 아그네스 타키온, 너라고 생각해."
목소리는 생각보다 진중하게 잘 나왔다. 여기까진 좋았으나 문장을 끝맺자마자 부끄러움이 등골을 타고 목까지 올라온다. 얼굴까지 붉어지진 않았겠지? 홱 돌아서려다 시야에 잡히는 것을 다급히 붙잡았다. 원래 붉은 색이었던 머리가 어느새인가 하늘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당하게 벌어진 입에서 부루퉁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러니까 이상한 약 먹고 이렇게 머리색이 변해도 계약 해지하지 않고 있지!"
"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그보다 하늘색 자네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만."
"말은 고맙지만 어울린다, 뭐다 문제가 아니잖아!"
머리카락을 내던지듯이 놓아버리자 타키온이 그걸 잡아내었다. 그저 사과가 떨어지는 곳에 손을 댄 것처럼. 타키온은 내 머리카락을 잠시 얼굴 가까이 갖다 대고 한 번 싱긋 웃었다. 색이라도 살피려는 건가. 순간 저기에 입이라도 맞추는 줄 알았네.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흰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이 흩어지더니 타키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색이 끝까지 바뀐 걸 보아하니 슬슬 약효가 나오겠군. 자! 이제 실험이다!"
"혹시 머리색 변하는 거 단순 부작용이 아니라 확인용이었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아까 말했듯이 오늘 시험은 최고 속도 관련, 정확히는 최고 속도 상승 및 그 도달 시점 단축이 목표일세. 스타트 후 직선 구간의 주파 기록을 재볼 거니 모쪼록 전력으로 뛰게나."
"알겠어."
"나는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도록 하지!"
"창문으로 나가지 좀 말라니까!"
내 잔소리에도 타키온은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창문을 넘어 달아났다. 신나게 펄럭이는 흰 가운 자락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타키온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쓰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을 것 같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곤 묶은 머리를 한 번 더 조였다. 나도 얼른 가자. 한편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고는 문밖으로 향했다. 기분 탓인지 약효 덕분인지,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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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타키온 육성 스토리 클래식급 주요 스포일러가 직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키온 육성 스토리를 보시지 않은 분께서는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타키온의 가족 설정은 원본마를 기반으로 한 개인적인 날조이니 관련 참고 부탁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7,789자
월계배. 현재 가장 기대 받는 우마무스메를 모아서 열리는 시범 경기. 말이 좋아 시범경기이지 그 심볼리 루돌프가 주최하고, 참여 명단이 호화스러운 만큼 G1 레이스 못지않는 주목을 받고 있다. 사츠키상 우마무스메인 타키온에게도 당연하다는 듯 초대장이 왔다. 레이스 참가는 약속할 수 없다. 늘 그렇게 말했던 타키온이기에 거절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승낙. 그 때문인지 최근 타키온은 트레이닝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토록 열중하던 실험과 연구도 뒤에 두고. 이상할 정도로.
조금이라도 더 타키온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혹은 괜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새벽을 꼬박 새워 월계배 참여자의 데이터를 쭉 정리했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출력하기 전에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쟁쟁한 참여자들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피곤한 만큼 뿌듯함이 올라왔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만족하며 스크롤을 쭉 내려 버렸다가 최하단 텅 빈 페이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익숙하디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그네스 타키온. 나의 담당 우마무스메. 이 자료는 타키온에게 보여줄 목적이니 굳이 정리하지 않고자 했다. 그럼에도 자리를 만들어둔 것은 나의 변덕이었다. 아마 그럴 터다. 하지만 타키온의 이름을 볼 때마다 자꾸 카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달리는 방식이 평소랑은 다른 것 같다는 그 말이. 그건 나에게 일종의 기폭제가 되었다. 애써 덮어놓고 모른 척하던 것을 자꾸만 들춰보고 싶게 하는 계기가. 그런 나를 타키온이 매번 막아서서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보았다. 가끔 타키온이 몰래 넘어오던 창문은 벌레 한 마리도 앉지 않은 채 깨끗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트레이너 기숙사 중에서도 불 켜진 곳은 극소수였다. 별마저 뜨지 못한 도시 하늘에서 달 하나만이 기울어진 채 나를 볼 뿐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혹시 내가 놓치는 게 있을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들 하니까. 온갖 명분과 핑계를 혼자 중얼거렸다. 분명 평범한 정보 정리일 뿐인데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손이 떨리는 것과는 별개로 정보 정리는 아주 수월했다. 담당 트레이너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동안의 트레이닝 내용, 뉴스 기사, 개인적으로 적은 일기 등을 비교하며 끊임없이 적어 내리다가 한 칸에서 잠시 속도가 느려졌다.
"가족 관계라…"
조모는 오크스, 모친은 벚꽃상. 타키온의 집안이 레이스 계에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한다는 건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이전부터 자자하게 들어온 얘기였다. 뻔한 내용을 적어 놓은 후, 짐짓 팔짱을 낀 채 공백을 노려보았다. 가족은 가족, 타키온은 타키온이다.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거기다 방임주의로 자랐다고 하였으니 가족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잘 모르는 시대의 이야기이긴 하니까… 이것도 레이스의 역사라면 역사니까 트레이너로서 알아둬서 나쁠 것도 없고…"
어째서인지 변명을 쭉 늘어놓고 있었다. 검지손가락으로는 마우스를 연신 톡톡 건드렸다. 타키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보니 새삼 더 파헤칠 곳이라고는 이쪽밖에 없었다. 마우스 커서가 허공을 배회하다 검색창으로 향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검색어를 바꾸었다. 타키온의 가족 명으로.
거대한 명성치고 인터넷 기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터넷 뉴스가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에 활동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만 담긴 글을 무의미하게 훑다가 뉴스 라이브러리로 이동했다. 당시 종이 신문을 아카이브한 거라 검색에 제대로 걸리지 않아 하나하나 훑어야만 했다. 비효율적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멈출 수가 없었다. 무패로 G1 1착, 연승. 타키온과 비슷한 경주 성적에 조금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뉴스 속 시간은 쑥쑥 지나 모친의 은퇴까지 향해갔다. 오크스 경주 중의 골절, 부상임에도 2착이라는 결과. 무패를 달리던 그녀는 첫 패배마저 화려했다. 많은 팬이 그녀가 곧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였지만 돌아오는 건 은퇴 선언이었다. 여러 신문사가 대서특필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은퇴 사유는 정확히 적혀있지 않았다. 그도 모자라 그 이후 미디어 노출도 강경하게 거부했다. 그런 태도 때문일까. 은퇴에 대한 풍문이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박수칠 때 떠난 것인가, 무패를 이어가던 그녀에게 2착마저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나. 뻔한 레퍼토리들에 하품이 다 나왔다. 인제 그만 봐야 하나 싶을 때쯤 한 주간 저널에서 시선이 딱 멈추었다.
"'정말 단순 골절인가… 그녀가 다리에 숨긴 은퇴 사유'?"
3면 구석에 작게 실린 기사였다. 이런 위치에서도 눈길을 끌어보려고 했던 건지 기사 제목은 꽤 그럴싸했다. 정작 함께 실린 사진은 타키온 모친도 아닌, 어떤 의사의 뒷모습이었다. 짧게 숨을 삼키고 기사를 천천히 확대했다. 눈이 먼저 글자를 접하고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재활 치료가 들어가야 할 시기에 재활치료사가 아닌 새로운 의사가 그녀의 집을 방문한 것을 발견… 해당 의사는 인터뷰를 거절… 다만, 해당 의사의 전공으로 미루어 굴건염 등 다른 건강상 문제가 있을 것으로…"
제대로 된 근거 없이 추측으로 점철된 찌라시. 머리가 내린 평가는 냉철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글자들을 접한 순간 눌러왔던 의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타키온은 본인 스스로도 실험 재료로 치부하며, 망설임 없이 약품을 마실 정도로 실험에 매우 적극적이다. 나나 다른 우마무스메에게도 실험을 권하는 건 어디까지나 검증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런데 유독 본인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하는 검증에서 유난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트레이닝도, 레이스 참가도 마찬가지. 이러한 태도에 대해 타키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다릿심을 소모하는 것보단 관찰하는 것이 더 좋다고. 왜 굳이 '소모'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은퇴를 고려해야 하는 시니어급도 아니고, 한창 성장 중인 주니어-클래식 시기에? 그랬던 타키온이 몇 번의 레이스를 거친 현재에는 왜 실험과 연구를 사실상 중지하고, 본인 몸으로 트레이닝에 임하고 있을까? 그런 타키온의 달리기를 카페는 왜 바뀌었다고 느꼈을까?
그러고 보니 그쯤부터 타키온이 플랜 A니, 플랜 B니 말하지 않았나?
"설마…"
내가 내 말을 끊어내기 위해 옆에 놓아둔 에너지 음료를 술처럼 쭉 들이켰다. 갑자기 다량의 카페인이 들어차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클래식 3관 플랜을 정한 후 뿌렸던 냉각 스프레이, 잠시 (구)과학준비실에서 지냈을 때 본 발 엑스레이 등이 이리저리 시야 사이를 오갔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뛰고, 다리가 달달 떨렸다. 모든 게 단순히 에너지 음료 때문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타키온의 언행을 되짚을수록 떠오른 가설은 점차 뚜렷해져 갔다. 차마 언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 대신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온갖 감정이 내 안에서 휘몰아쳤다. 왜 이런 중요한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이 정도로 내가 미덥지 않은 거냐는 원망. 담당 트레이너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달랐을까 하는 한탄, 그러지 말아 달라는 절규. 그 외에도 내가 아는 어휘로는 표현이 안 될 것들이 뒤섞여 속이 뒤집혔다. 의자에서 뛰쳐나가 변기를 붙잡고 안에 든 것을 쏟아냈다. 딱히 먹은 것이 없어 위액만 식도에서부터 길게 늘어졌다. 입안에 신맛이 감도는 게 무척 기분 나빴다.
얼른 세면대 물을 틀었다. 입을 먼저 헹구고, 물을 받아 연신 얼굴을 닦았다. 고인 물 위로 내 실루엣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위로 타키온의 형상이 겹쳐졌다. 그 타키온은 웃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대답이 돌아올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턱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타키온의 얼굴을 흐트러지고, 다시 내 얼굴이 보였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엉망이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적어도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내 얼굴을 덮었다. 그것이 우습게도 눈이 부셨다. 그래서 웃었다. 입꼬리를 힘차게 끌어올렸다. 마치 누구처럼. 몸에 영 힘이 없는 데도 바닥에 주저앉고 싶지 않아 벽에 기대었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을까. 단순히 추측만 한 나도 이 지경이다.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타키온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째서인지 쉬이 상상이 갔다. 내가 아는 아그네스 타키온은 솔직하지 못하다. 정확히는 본인의 마음조차 잘 몰라 제대로 표현을 못 하는 것에 가깝다. 레이스니, 레코드니 모든 것을 수단화하며 이용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그녀 또한 우마무스메다.
"우마무스메… 그녀들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우마무스메,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구절을 조심히 입에 담았다. 우마무스메 중에서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선 가장 달리기를 사랑하며 몰입하는 게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그래, 어차피 너는 달리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플랜 A니, 플랜 B니 가는 방식만 다를 뿐. 아마도, 너는, 결국. 더 상상하기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고민했다. 일반적인 트레이너라면 보통 이 시점에서 곧장 병원부터 데려갔을 거다. 그 결과에 따라서는 은퇴도 강행할 거고. 부상을 눈앞에서 보는 것보다 부상을 피해버리는 편이 훨씬 더 좋으니까. 그렇지만 언젠가 타키온이 나에게 말했듯이 '보통'의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대는 것은 맞지 않다. 타키온이 가장 우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거다. 은퇴를 '가능성'으로만 남겨놓다가 의사나 트레이너에 의해 강제 확정되어 버리는 순간을.
"이게 무슨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아니고…"
내가 말해놓고 헛웃음이 터졌다. 이 뚜껑을 열지만 않으면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는 우마무스메의 삶도, 죽음도 확정되지 않는다. 양쪽 다 그냥 가능성으로 둔 채, 타키온은 그사이의 줄을 타고 있는 셈이다. 아무래도 최근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지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울며 매달리고 싶다. 정말 그게 최선이냐고, 그게 진짜 네가 바라는 거냐고, 달리는 걸 멈추지 말라고. 체면도, 뭣도 다 집어던진 채 그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싶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것만큼은 싫다. 다 너를 위한 거라고 포장할 순 있겠지. 하지만 난 안다. 솔직히 이건 다 내 욕심이다. 너는 내 꿈이라고, 내 꿈을 감히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꼴이다. 멋대로 내 마음을 타키온에게 밀어붙이는 건 죽어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타키온을 스카우트한 날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때 분명히 타키온에게 말했다. 협력자가 되겠다고. 그렇다면 타키온이 무엇을 선택하든 끝까지 어울려줄 뿐이다. 그 끝에 울든, 웃든. 광대가 되어 네 발을 내 발 위에 올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춤을 춰주마.
"…트레이너 실격이네."
웃던 낯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손끝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미안해. 무의미한 사과가 샜다. 하지만 내가 너를 선택할 때 내어줄 수 있는 건 다 내어줄 각오를 했다. 그렇다면 너 역시 이런 나를 선택한 각오를 해야 했다. 억지라는 건 안다. 알고 있기에 언젠가 돌아올 원망도, 분풀이도 받아들이겠다. 손으로 눈물 자국을 벅벅 닦아냈다. 살이 쓸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후, 자리로 돌아가 현재까지 정리한 자료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소리와 함께 프린터가 여러 우마무스메에 대한 정보를 뱉어냈다. 출력물이 쌓여가는 것을 보며 눈을 연신 비벼댔다.
"아, 출력 설정 잘못했다."
이거까지 뽑을 생각은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나와버린 타키온의 페이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내 손으로 직접 양쪽을 잡아당겼다. 쓰다 말아 하얀색이 가득한 종이는 너무나 손쉽게 찢어졌다. 1/2로, 거기서 1/4로. 그렇게 계속 타키온의 정보는 점점 작아져 형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도시락 만들어야지."
휴지통 위에 손을 탁탁 털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붙여놓은 식단표를 잠깐 확인하고, 주섬주섬 재료를 꺼냈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
오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우선 늘 그랬듯이 타키온이 트레이너실에 찾아와서 함께 식사했을 거다. 식사를 마친 대로 타키온에게 밤새 정리한 자료를 전달하고, 타키온이 그걸 흡족하게 봤다. 그래,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러고 나서.
순간적으로 부끄러운 장면이 떠올라 이마를 짚었다. 타키온에게 도움이 되었단 사실에 기뻐 또 필요한 것은 없다며 온갖 말을 다 해버린 것이다. 감금이든, 약 섭취든 뭐든 다 해주겠다고. 뒤늦게 아차 싶어 멈추니 마주한 건 타키온의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 일 없던 척하려고 했는데 새벽의 영향일까.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 욕심을 강요하기 싫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너무 몰아붙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선 타키온은…
"모로보시 트레이너님! 듣고 계세요?"
"아, 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초록색 모자를 꾹 눌러쓴 타즈나 씨가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트레이너실 소파에 누워있단 걸 뒤늦게 깨닫고 황망하게 일어났다. 이 와중에 자고 일어난 터라 머리가 엉망이다. 묶고 있던 머리를 재빨리 풀어 손으로 연신 빗어 내렸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하아… 그러실 만하죠. 갑자기 아그네스 타키온 씨가 월계배 출전 취소를 하였으니…"
맞다. 생각났다. 타키온은 그 후 잠시 나와 대화하고서는 억지로 나를 재웠다. 지금 몸 상태로는 모르모트도 안 된다면서. 그렇게 지금 자고 일어났더니 학교가 타키온 월계배 출전 취소 소식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이마저도 자고 있던 날 타즈나 씨가 깨우고 알려줘서 알았다. 충격을 받을 새도, 그럴 정신도 없었다. 이제야 슬금슬금 타키온이 또 뭔갈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내가 또 멍하니 있어서인지 타즈나 씨가 손뼉을 한 번 크게 치며 정신을 일깨웠다. 바짝 전신에 힘이 들어가 꼿꼿하게 섰다. 담임 선생님께 불려 나간 학생이 된 기분이다.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아그네스 타키온 씨의 레이스 출전 취소는 트레이너 씨와 상의 후에 발표한 거 맞으시죠? 출전 취소 때도 안 계셨고, 지금 상태도 그러시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아, 네! 물론이죠. 결정 자체는 함께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조금 미련이 남아서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함께 가지 못한 거예요. 아하하… 참 부끄럽네요."
"…트레이너 씨가 일어난 후에 해도 되는 걸 왜 혼자 말한 건가요?"
"관련 상의를 할 때 제가 출전 취소할 거면 최대한 빨리 밝히는 게 낫다고 했거든요. 타키온은 잘 모르겠지만 예정했던 것을 재조정할 시간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편이 좋다고요. 아무래도 제 상태가 안 좋다 보니 혼자서라도 먼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거짓말은 아주 짠 듯이 줄줄 나왔다. 타즈나 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어봤다.
"정말이요?"
"네, 정말로요. "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심증이 어떠하든 당사자가 이렇게 말하니 타즈나 씨도 이 이상 따져 묻긴 어려운지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은 죄송하기도 해서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 타즈나 씨. 해당 출전 취소 건 아직 언론 발표는 안 되었죠?"
"네… 지금은 주최 측에 출전 취소 접수만 들어간 상태예요."
"언론 쪽은 기자회견 없이 학교 측 기사 배포로 부탁드릴게요. 관련 내용은 제가 오늘 중으로 작성하여 전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요?"
"당분간 아그네스 타키온 쪽으로 오는 취재 요청은 전부 거절해 주세요."
"네? 전부요?"
"네. 전부."
타즈나씨는 일순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연신 뻐끔거렸다. 이 사달을 내놓고 뻔뻔스럽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힘차게 허리를 숙였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타키온 출전 취소와 상관없이 월계배 관련 업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업무 몰아주셔도 되니까요!"
"자, 잠시만요. 모로보시 트레이너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무래도 전부는…"
"아, 그리고 죄송하지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위에 덮여있던 백의를 챙기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뒤에서 타즈나씨가 비명을 지르듯 나를 불렀지만, 의외로 잡으러 오시진 않으셨다. 아마도 아셨겠지. 내가 거짓말한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릴 수 없었기에.
"타키온… 타키온!"
타키온이 레이스를 멋대로 취소했다. 보통이라면 기겁하고도 남을 그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거지? 너만의 방식으로. 들뜬 마음으로 복도를 달렸다. 창을 타고 쨍한 초여름 햇빛이 내 앞길을 비추어 주었다.
*
"오. 잘 잤나, 아카네 군!"
(구)과학준비실 문을 열자마자 타키온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냐는 말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한쪽에 앉아 있던 카페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곧장 타키온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들고 있던 백의는 타키온이 앉아 있는 의자에 걸쳐 주었다.
"…한 건 했더라, 타키온."
"이미 알고 있었나? 설명할 시간을 아꼈군."
이전처럼 히죽 웃으면서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꽂혀있다. 흘끔 훔쳐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과 그래프로 가득하다. 어느 창 아래에 언뜻 보이는 엑스레이 사진을 애써 무시하고 타키온의 옆에 섰다.
"오늘 트레이닝은?"
"보다시피 지금 연구로 바빠서 말이지."
"이 흐름이라면 당분간 또 트레이닝 정지겠구나… 일단 알겠어."
"하하하! 잘 알고 있군! 그동안 몸 상태나 회복시키도록 하게. 어느 정도 분석이 끝나면 자네 차례니까! 아, 그래. 일단 거기 있는 것부터 한 병 먹게나."
"네에, 네에. 이건 뭔데?"
"뭐,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자양강장제라네."
자양강장제라… 가느다란 플라스크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절반 조금 넘게 갈색 액체가 채워져 있었다. 탄산이라도 들어있는지 안에서 연신 기포가 터져 나갔다. 안 마시는 선택지는 애당초 없다는 걸 알기에 단숨에 들이켰다. 따끔거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목을 한 번 매만지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일단 발광하는 곳도 없고, 머리색도 그대로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질문을 던지듯 타키온을 살펴봐도 여전히 내 쪽은 보고 있지 않다. 구태여 내 증상을 확인할 정도의 약은 아니었던 거다. 여전히 걱정해 주는 법이 서투르다. 남몰래 웃다가 타키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걱정하고 챙겨주는 건 내 역할이다.
"있지, 타키온.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뭔가? 짧게 해주게."
"당분간 등하교 나랑 같이하지 않을래? 바이크로 태워다 줄 테니까."
"흐음? 그래야 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일어날 트러블의 절반은 내 탓이라며?"
타키온은 한창 바쁘게 움직이다가 딱 멈추었다. 천천히 그 고개가 돌아가고 그제야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누구를 흉내 내며 히죽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책임은 져야지. 이동 시간 절감으로 연구 시간 확보, 학교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을 기자들 회피, 그 외 서포트. 필요하지 않아?"
타키온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날 따라 씩 웃었다. 이내 호쾌한 웃음을 한참 터트리더니 진득하게 내 눈을 쳐다봤다. 달리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걸 못 알아챈 나지만 이건 알 것 같다. 이 눈빛. 순진하며 깊고도 깊은 광기. 타키온이 가능성을 좇을 때의 그 눈빛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찌릿 울린다.
"좋군. 그러면 기숙사 통금 5분 전에 데리러 오도록 하게."
"아무리 바이크여도 여기서 기숙사까지 5분은 무리야! 적어도 교통 법규는 지킬 수 있게 해줘! 아, 맞다. 혹시 오늘 내가 실험해야 하는 건 없지? 온종일 바쁠 것 같아서."
"흐음. 오늘은 없을 것 같다만. 무슨 일 있나?"
"그걸 말이라고… 네 덕분에 무슨 일 아주 많아. 출전 취소 관련 언론 쪽에 넘길 자료 작성하고, 그 후엔 월계배 관련자분들한테 사과하러 다니고, 취소에 따른 업무 뒤처리도…"
"저런…"
뒷말은 뒤에서 나직하게 날아왔다. 뒤돌아보니 카페가 나를 가만히 보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왠지 카페가 날 보는 게 타키온 보는 거랑 비슷해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지그시 가슴을 눌렀다. 이거 잔잔하게 타격이 온다. 잠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어쩌겠는가. 이것도 자업자득인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타키온의 공간을 벗어나 카페의 앞을 가로 질러 호기롭게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를 쭉 들아마시곤 나가기 직전 한 번 뒤돌았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나중에 보자!"
"그래, 수고하게."
"안녕히 가세요."
타키온은 다시 연구에 집중했는지 날 보지도 않고 손만 까딱였다. 됐다. 지금은 그걸로. 타키온이 본인답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나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질끈 다시 묶고 제일 먼저 학생회실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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