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 타키온 X 아카네 첫 대면 이야기

* 원작 게임의 '아그네스 타키온' 스토리 1~4화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해당 스토리의 대사가 직접적으로 인용 및 활용되었습니다.

* 기본적으로 큰 틀은 원작 게임 내 '아그네스 타키온' 기본 스토리를 따라갑니다. 본 연성은 단순히 드림주의 설정과 드림캐와의 케미를 한 번 점검하기 위해 재구성하는 느낌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공백 미포함 13,093자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가 선연하게 떠 오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가족들의 손을 꼭 잡고 경기장에 갔을 때가. 알고 있는 제일 큰 수가 기껏해야 100밖에 안 되던 어린 시절, 생전 처음 보는 수의 사람들 사이에 끼여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집에 가고 싶다고 칭얼거리자 아버지는 기꺼이 목말을 태워주셨다. 시야가 높아지고 나서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귀가 터지도록 쏟아지는 함성, 코끝을 간질이는 잔디 냄새, 그리고 그 중심에 우마무스메들이 있었다. 눈 한 번 깜박하면 놓쳐버릴 것만 같은 스피드. 그들의 달음박질 소리를 따라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각자의 승부복을 휘날리며 달려 나가는 그들이 내 시야 가득히 편자 자국을 새겼다. 아나운서가 골인을 힘차게 외치고 1착 우마무스메가 높이 손을 흔들자 감정이 벅차올라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도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어!"

 

 그 꿈이 현실이랑 벽에 부딪혀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진짜 여기까지 왔네."

 

 펜스에 기대어 트레이닝 중인 우마무스메들을 보면서 정장에 달아둔 트레이너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자격 자체는 딴 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볼 때마다 기분이 생경하다. 아직 한 번도 우마무스메를 담당한 적이 없어서 그러겠지. 지금까지는 서브 트레이너 역할만 했으니까. 이젠 내가 직접 우마무스메를 찾아 스카우트하고, 트윙클 시리즈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내 첫 담당, 파트너 우마무스메. 상상만으로 긴장되어 가슴이 뛰면서도 손이 떨린다. 그런 내게 마지막에 같이 일하던 선생님께선 '이 우마무스메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든다면, 온힘을 다해 붙잡으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이 대체 어느 수준이냐고요!"

 

 머리를 붙잡으며 펜스에 머리를 박았다. 윙윙거리는 소리는 펜스에서 나는 건지, 내 머리에서 나는 건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숨을 길게 내쉬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 첫 스카우트를 앞두고 기합이 넘친 나머지 데뷔하지 않은 우마무스메 정보를 최대한 정리해 두었다. 모의 레이스, 트레이닝, 다른 트레이너들의 평가 등. 데뷔 전이라 공개된 정보가 많지 않기에 발품 팔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직접 보러 다니다 보니 새삼스레 더 가슴이 뛰었다.

 

 우마무스메 레이스의 중심, 트레센 학교에 모인 만큼 모든 우마무스메의 자질과 잠재력이 출중했다. 서툰 만큼 노력하고, 경험이 적은 만큼 순수하게 꿈을 꾸고 있었다. 한 마디로 눈부셨다. 다들 하나 같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다. 그래봤자 결국 아무도 스카우트 못한 현실을 깨닫고 입꼬리가 수직 강하하지만. 펜 끝으로 애꿎은 머리만 벅벅 긁었다. 모두 다 눈에 들어오니 도리어 아무에게도 스카우트를 제안하지 못하는 상태다.

 

 나 혼자 결정하는 일이면 이렇게 망설이지도 않는다. 그냥 하면 되니까. 그렇지만 함께 트윙클 시리즈에 도전한다는 것은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가 이인삼각으로 달려간단 뜻이다. 보통 트레이너가 일방적으로 우마무스메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수한 우마무스메는 도리어 트레이너를 선택하기도 한다다. 즉, 스카우트를 하려면 상대의 마음을 혹할 정도의 플랜이나 장점을 내세워야 한다는 거다. 다시금 트레이너 배지에 손가락을 올렸다. 툭하면 만지작거리는 것치곤 아직도 새것 같은 느낌이 난다. 나처럼.

 

"…이쪽이랑 아무 연고 없는 신입 트레이너랑 함께하고 싶어 하는 애가 있을까."

 

 혈연, 지연. 아무것도 없다. 학연은 약간 있는 정도.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작부터 이런 태도인데 잘도 스카우트가 되겠다.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수첩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일부러 소리 내어 닫아버리고 몸 방향을 틀었다. 괜찮다. 아직 신입인 만큼 기간은 남아있다. 정보 수집도, 땅 파는 것도 이제 끝. 앞으로는 전략을 짜서 진짜로 스카우트를 하자. 마지막으로 배지를 꽉 잡은 뒤 손을 떼버렸다.

 


 

 오늘은 이쯤 해둘까. 쭉 기지개를 켜며 트레이너실을 쭉 둘러보았다. 지금은 나 혼자만 이용해서 그런지 유독 넓고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곧 우마무스메도 같이 쓰게 되겠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트레이너실 밖으로 향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창밖으로는 해가 막 떨어지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붉은빛이 막 퍼져나가는 것을 흘겨보면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하교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학교가 꽤 조용했다. 아니, 그래야 할 터였다.

 

 "목소리?"

 

 이상하다. 보통 이 시간대는 운동장이 시끄럽지 실내가 시끄럽진 않은데. 남아있는 아이가 있는 걸까. 어쩐지 신경이 쓰여 소리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가까워질 수록 단순 소리에 불과했던 대화의 맥락이 점차 잡힌다. 교실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선생님이 반장을 시켜 학생을 부르라고 한 건가? 딱 복도가 꺾어지는 지점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니 우렁찬 목소리가 나에게 꽂혔다.

 

 "헉! 거기 트레이너 선생님! 타키온 학우님을 막아주세요~!"

 

 내가? 우마무스메를? 막아? 여러 반문이 생각났지만 내 몸은 성실하게 다가오는 우마무스메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제야 막으라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복슬복슬해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독특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깊이 침잠된 듯, 또렷한 눈빛. 흠칫 몸이 떨렸다. 그러고 보니 타키온이라고 불렸던가.

 

"그렇다면…"

 

"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아직도 멈추지 않고 나에게 돌진하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두 팔을 겹쳐 얼굴 앞을 막았다. 팔 사이로 보이는 그의 다리는 일단 멈춰있긴 했다. 어째서인지 점점 더 다가오는 게 문제였다. 아, 설마 속도 때문에 바로 못 멈추는 건가? 복도에서 짧게 달렸는데도 제동거리가 생긴다고? 얼마나 빠르길래? 의문도 잠시 충격이 1차로 팔에 가해지고, 몸이 뒤로 퉁겨지면서 2차로 뒤통수에 가해졌다. 점차 점멸하는 시야로 붉은 눈동자를 멀거니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가속도가 안 붙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반사 신경… 다리도 꽤… 인간 상대론…"

 

목소리? 알림 소리에 깨어나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고 일어난 후의 상쾌함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부딪힌 곳이 욱신거리고 어지러울 뿐이다.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하얀 커튼이 날 둘러싸고 있었고, 아래에는 다소 딱딱한 침대가 있었다.

 

"여긴…"

 

"깨어났나?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인 모양이군."

 

차륵. 커튼이 쳐지며 순식간에 붉은빛이 쏟아졌다. 역광 때문에 상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의 실루엣은 확인할 수 있었다.

 

"너는…"

 

"통성명은 나중에 하지. 의식이 막 돌아온 참이니 안정이 먼저야. 자, 의자에 앉게나."

 

이미 침대에 있는데 왜 굳이. 잠시 의문은 들었지만 정신을 차렸으면서 침대에 계속 누워있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았다. 근처에 널브러진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 그가 두드린 의자에 앉았다. 뒤통수는 여전히 얼얼하지만 멀쩡히 걷는 걸 보면 큰 이상은 없는 것 같다. 내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했다. 아그네스 타키온. 아마 내가 여기 오게 된 원인이자 옮겨준 은인.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입꼬리를 쭉 끌어당겨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잇새로 한숨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막는 데엔 실패한 것 같네."

 

"이런. 말하는 걸 보아하니 기억은 멀쩡한 것 같군. 일단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예'다. 쓰러진 자네를 옮기는 게 우선시되어서 반장 군을 물리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지. 하하! 그 건에 대해선 감사를 표하지."

 

"애초에 왜 쫓기고 있던 건데?"

 

"별거 아니야. 연구하다 아주 작은 헤프닝이 있었을 뿐이지."

 

"연구… 그렇다면 그 소문은 진짜였구나."

 

자질을 출중한 이들만 다니는 트레센 학원에서 입학 때부터 굉장한 능력을 지닌 우마무스메라는 평을 듣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중 하나가 내 눈앞에 있는 아그네스 타키온이었다. 화려한 명성을 갖고 있는 집안, 그 속에서 '초광속'이라는 이명을 이미 갖고 있을 정도의 실력. 다만, 그에 비례할 정도로 괴짜 같은 성격이라 아무도 스카우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악평이 있는데도 인정받는 실력이라니.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궁금하여 그만 조사하러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의 레이스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스카우트와 데뷔를 위해서라도 우마무스메들은 선발 레이스에 주기적으로 참여하는데도 말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레이스 기록도 현역과 견줄 정도이다 보니 제대로 조사한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잠깐 확인해 보려고 수첩을 꺼내려 할 때 팔에 뭔가 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팔과 몸통이 밧줄에 묶여있었다. 나도 모르게 새된 소리 터져 나왔다.

 

"아니, 잠깐만. 이게 지금 무슨?!"

 

"너는 생각에 몰두하면,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는 타입인가? 아니, 나도 그쪽에 한해서는 동류니 그 기분을 모르진 않지만. 하지만 친절하게 충고해 두자면, 자신의 상황 정도는 언제나 살피는 걸 추천하지."

 

"보통 그런 충고를 사람을 묶어놓고 하진 않지?!"

 

"나에게 '보통'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부터가 맞지 않아. 애초에 나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으면서 진작 도망가지 않은 자네가 나쁘지 않은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뭐, 이상하긴 해. 이 정도면 소문을 알고 있다는 수준이 아니니까 말이야."

 

타키온은 주머니에서 보란 듯이 무언가를 꺼냈다. 끈으로 가운데를 가로지른 갈색 가죽 수첩. 놀라서 몸을 움찔거리자 몸이 묶인 의자도 같이 덜컹거렸다. 타키온이 한 팔로 의자를 누른 채 수첩을 바로 눈앞에 갖다 댔다.

 

"앗, 내 수첩!"

 

"꽤 흥미로운 데이터였어. 데뷔 전 우마무스메 정보는 흔치 않으니 말이야. 직접 정리한 건가?"

 

"뭐, 그렇지. 그보다 돌려줘!"

 

"이런. 보채지 말게나. '괴짜'이긴 해도 도둑질은 안 하니."

 

낮게 웃으며 타키온은 수첩을 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괴짜'라고 언급한 걸 보면 이미 내용을 다 본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 돌려주기만 하면 도둑질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기가 차 그를 노려보아도 뭐가 재미있는지 입가엔 미소가 여전했다.

 

"하나만 더 묻도록 할까. 거기 수첩에 적힌 대로 나에 대해 영 안 좋은 소문이 퍼져서 말이지. 이젠 피험자는커녕 아무도 나와 마주치려고 하지 않아. 그런데 자네는 나를 알아보고도 도망치지 않았어. 어째서지?"

 

"그야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참고는 하지만."

 

"흐음?"

 

"기회가 있다면 너도 한 번 직접 보고 싶었어. 기대치가 높은 거 치고 이상할 정도로 정보가 적었으니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하하하! 과연. 가능성은 그대로 두되 실제 관찰하려는 타입이란 건가. 지식욕도 제법 있어 보이고. 좋군."

 

타키온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았다. 걸쳐 입은 백의가 휘날리며 커튼처럼 내 앞을 막았다. 뭘 하는지 보이지 않으니 불안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마른침을 끌어모아 꿀꺽 삼킬 때쯤 유리끼리 맞부딪혔는지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간단한 의문은 해결되었으니 다음은 실험이다! 모르모트군. 아니, 잘못 말했다. 신입 트레이너군."

 

"지금 모르모트라고 했어?!"

 

"다 큰 어른이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말게나. 자!"

 

타키온은 아까 수첩 때와 똑같이 무언가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투명한 플라스크 안에 연두색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두려움이 되어 척추를 타고 달렸다.

 

"뭐야, 그건?"

 

"이제부터 한 병… 아니 건강하니 더 가능하겠지, 3병 정도 약을 마셔줘야겠어."

 

낮게 웃음을 흘리며 타키온은 반대쪽 손으로 다른 플라스크 2개를 꺼내 들었다. 저쪽도 색이 영 심상치 않다. 도저히 현 상황이 받아들여 지지 않아 멍청한 질문이나 내뱉었다.

 

"설마 마시는 게 나야?"

 

"아, 걱정 말게…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해도 최대 몇 시간 정도, 양다리의 피부가 황록색으로 번쩍이는 정도야. 귀여운 부작용이지?"

 

"귀엽겠냐고! 이미 인간이 아니잖아!"

 

묶여있는 상태로 혼신을 다해 외쳐보아도 타키온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약에 대한 설명을 쭉 늘어놓을 뿐이었다. 인간의 대퇴사두근 수축이 어쩌고, 인간과 우마무스메의 신체 구조 비교 저쩌고… 꽤 흥미로운 이야기긴 했다. 실험 당사자가 나만 아니었다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양호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면 나름 크고 길게 소리쳤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들을 만한 정도로. 그 소문 때문에 아무도 타키온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제발, 제발. 내 기도가 통한 건지 문에 달린 작은 창문에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싶더니 양호실 문을 조심히 열었다.

 

"타키온 씨… 또 그런 걸 하고 있나요…"

 

"호오, 카페 아닌가!"

 

카페라면 혹시. 금빛 눈동자가 잠시 나에게 향했다가 이내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우마무스메치곤 마른 체격. 분명 맨하탄 카페다. 일순 반가운 마음이 들다가 다시 차가워졌다. 생각해 보니 소문만 따지면 이쪽도 만만치 않았었다. 다들 한 입 모아 무섭다고. 뭐였더라. 아무도 없는데 '친구'를 운운한다던가…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본 탓일까. 카페와 눈이 마주쳤다. 텅 빈 것 같은 눈빛에 일순 동정심이 어린 것을 똑똑히 보였다. 어라. 혹시 무서운 애는 아닌가. 평가가 바뀌려던 순간 타키온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그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지? 혹시 실험에 협력을…"

 

"안 해요. 선생님이 부르길래 전하러 왔을 뿐이에요… 다음 선발 레이스 참가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네요…"

 

레이스 참가? 그 타키온이? 순간 내 상황도 잊고 귀가 바짝 섰다. 상기된 나와 다르게 당사자인 타키온은 늘 걸려있던 미소를 지운 채 시선을 회피했다. 마치 곤란하다는 듯이. 그건 아주 잠깐일 뿐. 카페가 얼른 가라며 보채자 얼버무려는지 곧바로 웃어버렸지만.

 

"신입 트레이너 군, 또 보지!"

 

"갈 땐 가더라도 이거 풀고 가!"

 

"…하아. 밧줄… 풀어줄게요…"

 

"고, 고마워…"

 

살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격렬하게 반항했는지 밧줄로 묶였던 곳이 제법 쓰라렸다. 상처는 안 났겠지? 그래야 할 텐데. 차마 바로 나가지 못하고 팔뚝을 매만지고 있자 카페가 톡톡 어깨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저기…"

 

"응?"

 

"저 우마무스메는 다른 이들한테도 똑같이 그러고… 악의가 있던 건 아니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래도… 앞으로 조심하시고요."

 

"아, 응. 알았어. 그, 너는 맨하탄 카페 맞지?"

 

"네… 저를 아시는군요."

 

"응. 달리기가 굉장하다고 들어서 말이야. 아무튼 오늘 일은 고마워. 친절하구나."

 

내 말에 카페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소문대로 무서운 애는 아닌 것 같다. 나머지 한 쪽은 소문 이상이어서 당황스러웠지만. 가볍게 인사하고 지친 몸을 이끌었다. 양호실을 나가기 직전 누군가가 등을 토닥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타키온이 선발 레이스에 참가했다는 이야기가 학교 전체에 돌았다. 타키온이 본래 갖고 있던 명성, 전무하다시피 한 참여 기록 등으로 웬만한 트레이너들이 참관하러 몰려왔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선발 레이스를 연이어 보면서도 자꾸만 그때 타키온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시종일관 웃던 그가 얼굴을 딱딱히 굳히던 그 한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애초에 본인 의사로 참여하긴 한 걸까. 아니나 다를까. 타키온 본인을 찾기 위해 학원 측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듣자하니 이번 출전도 학원 측에서 통보했던 모양이다. 회장인 심볼리 루돌프까지 직접 나와 삼엄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심각한 상태인지 예상이 갔다. 학원 측 통보에도 따르지 않을 정도이니 아마 이대로라면…

 

"…찾으러 갈까."

 

이제 와서 찾는다고 해도 방법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음 참가를 대기하고 있던 맨하탄 카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일찌감치 좋은 자리 차지한 보람이 없다, 정말로.

 


 

"너 오늘 선발 레이스 나가는 거 아니었냐고!"

 

제법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딱 꽂혔다. 세상에 이런 말을 들을 우마무스메가 또 있을까. 정신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학교 정원에서 트레이닝복도 입지 않은 타키온이 다른 우마무스메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마 에어 샤커였나.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인 그가 더욱 날카롭게 타키온에게 일갈하고 있었다. 말투만 그럴 뿐이지 레이스에 안 나간 타키온을 걱정해 주고 있나? 갑자기 내가 둘 사이에 끼긴 뭐해서 잠시 숨어 상황을 지켜봤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내 안에 불길한 예감만 더욱 선명해졌다. 얼마 안 있어 떠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타키온."

 

"흠, 아니… 너는… 지난번에 만난 신입 트레이너군!"

 

"기억은 하고 있구나."

 

"꽤 흥미로운 모르모트였으니 말이야. 비록 실험은 못 했지만… 설마 그때 실험을 이어서 해주려고 자발적으로 온 건가!? 이 얼마나 훌륭한 모르모트 정신인지! 감복할 수밖에 없군!"

 

"아냐, 아냐, 아냐, 아냐! 레이스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아, 그거였나."

 

내 말에 타키온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입꼬리는 습관처럼 올린 상태였지만 흥미가 뚝 떨어진 게 한눈에 보였다.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나는 참가할 의향이 없어."

 

"오늘 이후에도?"

 

"언제든지. 선발 레이스인 이상 마찬가지야. 자네는 선발 레이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마치 교수가 학생에게 질문하듯 타키온은 손가락을 튕기며 나를 가리켰다.

 

"우마무스메들이 실력을 내보이고, 그걸 본 트레이너들이 스카우트 대상을 찾는 자리지."

 

"정석적인 답변이군. 맞네. 하지만 현재 나는 트레이너들에게 실력을 어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러니까 불참한다. 이야기는 이상이야."

 

"이미 실력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아니면 레이스 자체보다 실험이나 연구가 더 우선시되어서?"

 

"후자라네. 온갖 가능성은, 실험을 통해 발굴되고 검토되어야 하는 법. 연구를 할 시간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해, 그렇지 않나?"

 

"그렇게까지 하는 연구가 어떤 건데?"

 

"질문이 꽤 많군 그래?"

 

"궁금하니까."

 

내 말에 타키온은 낮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일순 양호실에서 있던 일이 떠올라 섬뜩했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무서워도 궁금하니까, 알고 싶으니까. 코앞에서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우마무스메의 가능성'이야."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마무스메라는 생물에게 잠든 육체의 가능성', 즉 '최고 속도'. …아니, '최고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해둘까."

 

말에 점점 환희와 열기가 어린다. 타키온은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레 두 팔을 펼치고는 자기 가슴에 척 손을 올렸다. 나는 그의 관객이라도 된 듯이 그 일련의 과정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눈 하나 깜짝이지도 못한 채.

 

"나는! 이 몸으로 가능성의 끝… '한계 속도'를 알고 싶은 거다!!"

 

"가능성의 끝…"

 

쿵쿵 심장이 뛰었다. 중얼거린 내 말에도 열기가 어린 것 같았다.

 

"아그네스 타키온."

 

내가 부른 게 아니었다. 몹시 딱딱한 말투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목에는 직원증이 걸려있었다. 교직원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요동치던 심장이 멈추며 온몸의 피가 삽시간에 식었다.

 

"…학원 측에서 전달 사항이 있어. 따라와."

 

"흐음, 여기서 호출인가.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지, 신입 군."

 

"모로보시 아카네!"

 

지르듯이 외쳤다. 뒤늦게 손으로 입을 막아봤지만 한 번 튀어 나간 말이 돌아올 리도 없었다. 타키온은 직원을 따라가다 말고 나를 지그시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에 만났을 때 통성명은 나중에 하자며. 이제와서지만. 일단은 기억해줘."

 

"그래, 내키면."

 

타키온은 일말의 미련도 없는지 홱 몸을 틀었다. 나만 구질구질하게 그 자리에 박혀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타키온은, 아마.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정체를 확인하고 진정하려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심볼리 루돌프. …회장."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혹시 아그네스 타키온은 퇴학 되는 거야?"

 

선발 레이스 미참가, 트레이너 스카우트 거부, 학교 측의 지시 불이행. 그 일련의 문제 행동 뒤에 교직원이 직접 그를 데려갔다. 그 끝에 퇴학이 있을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루돌프는 아까까지 타키온 있던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 여유와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치고는 쓸쓸함이 감돌았다.

 

"트레센 학원은 학생들의 자주성을 중시하니 일방적인 퇴학 처리는 하지 않아. 다만…"

 

"…권고는 하겠구나."

 

내 말에 루돌프는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쓰게 웃었다.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권고라니. 사회생활에서 이처럼 편한 말도 있을까. 학교가 직접 일개 학생을 불러서 하는 말인데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물론 타키온은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은 아닌 것 같지만, 동시에 퇴학도 신경 안 쓸 것 같아서 문제다. 받아들이겠지, 분명. 손끝이 점차 식어가는 것 같아서 손을 주물럭거렸다.

 

"신경 쓰이는 건가?"

 

"응.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 않네."

 

"나도 마찬가지야. 숙려기간은 주어질 테니 그동안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의 눈동자가 나에게 되돌아왔다. 또렷한 눈빛은 왜인지 날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주면 좋겠어, 모로보시 아카네."

 

"내 이름을 어떻게…"

 

"아까 힘차게 소개하는 걸 들어서 말이지. 그럼 다른 일이 있어서 난 이만."

 

루돌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점차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 빛을 똑바로 노려보다 눈을 감았다. 잔광 때문에 눈이 아프다.

 

"협조라."

 

내가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뒷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트레이너 배지를 매만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게 좋겠지."

 


 

"타키온, 퇴학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호오, 신입 군. 요즘 자주 만나는데? 정보 수집 능력도 여전한가 보군."

 

타키온을 다시 만난 건 웃기게도 그때 그 복도였다. 퇴학이란 말을 했는데도 타키온은 한결같은 태도였다. 그보다 이름 알려줬는데 잊어버린 걸까. 약간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질문이나 던졌다.

 

"연구는 어떻게 할 셈이야?"

 

"물론 연구는 계속할 거야. 퇴학을 할 뿐이지 내 두뇌와 육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

 

"트윙클 시리즈는? 그야말로 네 연구에 걸맞은 장이잖아."

 

"뭐, 그건 자네 말대로 아깝긴 해. 연구의 진전도 한참 느려지겠지."

 

타키온은 선 채로 턱을 괸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방해를 받아서 이대로 멈춰 서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뛰어난 우마무스메가 모이는 건 트윙클 시리즈뿐만이 아니니까. 해외로 갈 생각도 하고 있지."

 

"방해란 말이지. 이곳이…"

 

"뭐, 그런 말 말게. 언젠가 올 날이 왔다는 거다. 아니, 나 자신도 떠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잘된 일이야』 같은 서운한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오! 학생들의 톱이 등장할 줄이야. 놀랍군."

 

"잠시 실례하지. 그녀에게 용무가 있어서."

 

루돌프는 나에게 알은체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도 잠시 타키온을 보자마자 확 진중한 태도로 돌변했다.

 

"…아그네스 타키온, 퇴학 의지는 확고한가?"

 

"나는 내 의지를 언제나 연구 활동에 바치고 있다네, 회장. 질문은 이게 끝인가?"

 

"…그래, 끝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요청이군."

 

"요청? 흐음, 무슨 요청이지?"

 

"나와 병합 훈련을 해 다오, 아그네스 타키온."

 


"호오… 약삭빠르게 객석에 앉았나. 너도 제법 대범한걸, 신입 군."

 

텅텅 빈 객석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으니 타키온이 툭 말을 던졌다. 모든 수업, 트레이닝이 끝나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그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주변을 괜히 살펴본 후, 들고 있던 수첩을 보란 듯이 흔들며 뻔뻔스레 대답했다.

 

"말했었잖아. 나는 너도 한 번 직접 보고 싶었다고. 거기다 그 '황제'까지 있는데 이걸 놓칠 수 있을 리가."

 

"하하하! 뭐, 지식욕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싫지 않아. 원하는 만큼 관전하도록 해."

 

내가 이 코스를 달리는 것도 마지막일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타키온은 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미련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냥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 이곳에 대한 애정이 있길 바라면서.

 

곧이어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루돌프가 다가왔다. 둘이 코스 등 간단한 얘기를 주고받는 걸 청강생처럼 조용히 지켜보았다. 대화를 마치고 타키온이 먼저 패덕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후 스톱워치 들었다. 마지막이라고 해도, 아니 마지막이니까 더더욱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어쩌면 국내에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루돌프도 바로 뒤따라갈 줄 알았건만 예상과 달리 그는 입을 다물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눈치를 보며 스톱워치를 잠시 내려놓자 그는 혼잣말인지 모를 것을 중얼거렸다.

 

"연구를 위해 트윙클 시리즈가 나갈 필요가 있어서 입학했다. 하지만 재학 생활 자체가 연구를 방해한다면 퇴학도 불사한다. 트윙클 시리즈에 구애받지도 않아. 거점을 옮겨, 거기서 다른 실력자들이 모이는 레이스를 나갈 뿐…"

 

말을 중간에서 끊고 그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혼잣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났다.

 

"여기까지는 실로 논리적이지만, 그렇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왜 굳이 이 학원에 들어와 최후통첩을 받을 때까지 버텼는지. 그걸 지적하고 싶은 거야?"

 

"그래. 『담당 트레이너』라는, 그녀가 말하는 『방해꾼』에게서 절대 도망칠 수 없는 학원에, 어째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물음표로 말을 끝냈지만 영 질문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속의 의미가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태양은 오늘도 마지막까지 붉은빛을 힘껏 발산하고 있었다.

 

"…묻는 건지, 요청하는 건지 모르겠네."

 

"후후, 글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뭐라 하든 달리기를 보기 전까진 뭐라 할 수 없어. 일단은 나도 트레이너니까."

 

"그렇군. 자, 그러면 나도 이제 준비하러 가야겠어.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제야 그가 내 곁을 떠나갔고, 나 역시 스톱워치를 다시 들었다. 수첩에 간결히 적었던 타키온의 정보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오직 나 혼자만이 보고 있는 채 '초광속'이라고 불리는 타키온과 '황제' 심볼리 루돌프의 대결이 펼쳐졌다. 두 사람 다 동시에 출발하여 너른 잔디를 가로질러 갔다.

 

"빨라…"

 

꿀꺽. 침을 삼켰다. 심볼리 루돌프의 각질은 분명 선입. 그러니 레이스 초반인 지금은 힘을 아껴놓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타키온을 상대로 레이스를 계속 리드하고 있었다. 구간별 타임을 재봤을 때 타키온도 상당히 빨랐다. 루돌프가 이끄는 대로 하이 페이스 전개인가? 아니면 타키온이 이 정도는 따라갈 수 있는 건가? 수첩이 바닥에 떨어지든 말든, 그들을 보기 위해 펜스 너머로 몸을 쭉 뺐다. 뒤처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타키온은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직선으로 들어가자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더욱 빠르게! 더욱 빠르게!! 더욱 빠르게!!!"

 

붉게 타들어 가는 노을 아래로 두 우마무스메가 달려 나간다. 황제니, 초광속이니. 남들이 멋대로 붙인 칭호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달리기 그 자체만이 중요했다. 저녁 찬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흥분에 내 가슴이 요동쳤다. 잔잔하기만 하던 저녁에 그들이 나에게 자아낸 돌풍. 그 중심에 있던 눈동자는 광기에 휩싸였으면서도 더없이 순수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또 쿵쿵 뛰었다. 펜스를 붙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몹시 익숙하고도 오랜만인 감각에 현기증이 일 것만 같았다.

 

어린 나는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었다. 그건 단순히 빨라지고 싶다는 욕망인 줄 알았다. 육상부에 들어가 대회도 나가보고, 큰 후에는 바이크를 몰아보기도 했다. 내 다리로, 또는 도구로 더 빠르게 나아가 보아도 항상 어딘가 부족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내가 바라는 건 단순히 빨라지는 게 아님을, 우마무스메 그 자체를 동경하게 되었음을. 동시에 내 육체로는 평생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알고,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대체 우마무스메가 뭐길래 저렇게 빛보다 빠르고 찬란하게 나아가는 걸까. 어떻게 이토록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걸까. 달음박질 소리에 어린 나의 질문이 섞여 들려왔다. 아마 나는 우마무스메의 레이스를 처음 본 순간 눈이 멀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우마무스메의 가능성…!"

 

이보다 더 빨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한계 너머엔 대체 뭐가 있는 걸까. 현재의 내 질문이 그 위에 쌓였다. 어쩌면 너라면 모두가 비웃으며 넘겼던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역시 계속 꿈을 꾸고 싶다. 어쩌면 누군가가 비웃을 허무맹랑한 꿈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너와 함께.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또다시 눈이 멀어도 좋다.

울듯이 웃으며 눈을 부릅떴다. 내 눈동자에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하는 두 명의 우마무스메가 똑똑히 비쳤다.

 


 

 달렸다. 객석 계단은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했다. 저 멀리 타키온과 루돌프가 무어라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발을 뻗었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헐떡거린다. 그런데도 괴롭지 않다. 오히려 그저 두근거리기만 했다. 이 우마무스메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든다면, 온힘을 다해 붙잡아라.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런 레이스를 펼쳤는데도 둘은 생각보다 생생해 보였다.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대화 중인 걸까. 끝나고 와야 하는 걸까. 그런 당연한 예절따위 차릴 겨를도 없었다. 지금 그를 놓치면 안 된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그들을 목전에 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그네스 타키온!"

 

"…흐음? 너, 어떻게 된 건가, 그 눈은. 엄청… 광기 어린 눈빛인데?"

 

웃음이 나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서. 그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루돌프는 자리를 피해줬다. 당했다.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는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다. 잠시 숨을 길게 내쉬고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아직 트윙클 시리즈에서 연구하고 싶은 마음 있어?"

 

"…설마,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말할 셈인가? 어이, 어이, 그만둬, 이 이상 연구가 밀리게 하고 싶지 않아."

 

"『담당 트레이너』가, 네가 말하는 『방해꾼』이 아니면 되는 거잖아."

 

나는 신입 트레이너. 뛰어난 가문 출신도, 이렇다 할 경력도, 자신 있게 내세울 트레이닝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보통의 우마무스메라면 내 스카우트를 아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타키온이다. 앞서 나열한 것 중 무엇도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다른 것을 내어줘야 한다. 각오를 다지기 위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전에 보여준 약은 있어?"

 

"갑자기 왜 그러지. 있다만."

 

타키온은 벤치로 가더니 가방에서 물약 3개를 달그락거리며 꺼냈다. 설마 했더니 진짜 있구나. 기겁하는 동시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내보일 수 있는 것. 이거면 된다. 이거라면 될 거다. 거의 빼앗듯이 물약을 가져가고 곧장 3개 다 입에 털어 넣었다. 타키온은 여유만만하던 태도가 깨진 채 입을 벌렸다.

 

"…놀랍군."

 

처음 듣는 나직한 톤, 입에 감도는 약 맛. 참지 못하고 얼굴을 와작 구기자 타키온은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기세 좋게 피험자가 되고 싶어 하는 녀석이 어디 있나!? 그야말로 모르모트군, 너는!!"

 

"모르모트라도 상관없어!"

 

"제법 유쾌한 말을 하는군. 실험동물이라도 좋다고? 인권을 내다 버리는 일인데 정말로 괜찮겠나? 크크큭!"

 

"괜찮아! 같이 '그 끝'을 볼 수만 있다면!"

 

인권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얼마든지 주마. 자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내가 넘치도록 내어줄 수 있는 것들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우마무스메 그 자체를 동경하여 마구잡이로 달려가는 건 원래도 해오던 일이다. 신입 트레이너이기에, 아니 나만이 가능한 것. 내용물을 다 마셔 텅 빈 약병을 타키온에게 내밀며, 선언하듯 외쳤다.

 

"내가 너의 『담당 트레이너』가, 너의 『협력자』가 되게 해줘!"

 

"말은 평범하지만, 광기의 포로…인가, 큭큭큭큭."

 

이제까지와 달리 그는 낮고 짧게 웃었다. 눈썹이 찡그러져 있어 잘못 보면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정말 울음을 참는 것일지도 몰랐다. 담당 트레이너, 데뷔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학원에 그는 이때만을 기다리며 버틴 걸 테니까. 잠시 아무 말 없이 날 보던 타키온은 두 발짝 내게로 다가왔다.

 

"그럼 결정됐군, 가도록 할까."

 

"그 말은 즉, 내 스카우트를…"

 

"크큭, 네 대접은 모르모트, 또는 그 아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오도록 해라."

 

타키온이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내민 약병을 배턴터치처럼 받아낸 그가 눈꼬리를 휘어가며 웃었다. 의기양양하게, 광기 어린 채로.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끝'을, 내가 보여주지, 모로보시 군."

 

이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제야 나는 안심하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잘 부탁할게, 타키온."

 


 

"…잠시만."

 

"왜 그러지? 이제 와서 본인의 인권이 소중해졌나?"

 

"이 꼴로 가자고?"

 

"하하하! 이런. 그것도 그렇군!"

 

내 손가락 끝에는 황록색으로 빛나는 내 다리가 있었다. 솔직히 부작용은 거짓말이 아닐까 했는데 진짜로 빛나는 줄은. 내 몸인데도 영 생경하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물러? 내 마음도 모른 채 타키온은 실컷 웃기만 했다. 얼마나 웃었으면 눈꼬리에 살짝 눈물까지 맺혀있다.

 

"기껏 트레이너가 생겼는데 쓸데없는 혼란이나 오해를 사면 곤란해! 증상이 진정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겠군."

 

"그냥 내일 가자, 내일. 근데 이 약 뭐였지? 대퇴사두근 뭐라고 하지 않았어?"

 

"흐응~"

 

"약을 또 먹는 것도 곤란하니까 확인할 거면 지금 해두자. 마침 아무도 없고."

 

"하하하! 정말 훌륭한 모르모트라고 칭찬해야 할지, 뭐라 할지!"

 

타키온은 벤치로 가더니 노트북, 웹캠, 스톱워치 등을 척척 꺼내 옆구리에 끼웠다. 그리고선 상쾌한 표정과 함께 냅다 객석을 향해 가는 게 아닌가.

 

"자! 그럼 달릴 준비 하게! 2,000m면 되겠지."

 

"아까 네가 달렸던 그 거리!?"

 

"당연하지! 여기서 바로 실험하자고 한 건 자네가 아닌가! 우마무스메와 인간을 비교하자 했던 것이니 조건은 맞춰야만 하지. 거기다 약효는 고작 몇 시간 지속. 아니지. 3병을 동시에 먹었으니 정확히 어떻게 될 지 나도 예상할 수 없어. 지체할 시간이 없단 말일세!"

 

"뭐라고? 나 괜찮은 거 맞아!?"

 

"직접 기세 좋게 먹어놓고 약한 소리 말게. 자자, 객석에서 신호는 줄 테니 얼른 위치로 가도록."

 

"이, 이익…!"

 

아까랑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따지고 보면 모르모트를 자처한 이상, 그냥 우리 관계가 보통과 반대이긴 하다만. 그냥 이대로 도망칠까? 그런 잡생각은 타키온이 신호한 순간 날아갔다. 푸르른 잔디 위를 황록색 다리로 가로지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탁 트인 곳을 전력으로 뛰는 건 오랜만이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계속 내리며 노을 아래에서 실컷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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