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글은 극장판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을 기반으로 작성되어 해당 작품에 대한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극장판을 보지 않으신 분께서는 해당 글을 읽는 것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최강의 정의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8,329자


 

잊을 수가 없다. 타들어 가는 노을 아래로 그보다도 더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던 너를. 턱까지 올라온 숨을 고르지도 않고 너는 내 이름을 있는 힘껏 외쳤다. 붉은색만이 가득하던 그때 네 두 눈만은 광기가 어려 푸른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모든 곳을 이곳에 묻어두고 가려던 나에게 너는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나를 부르고, 나의 의사를 확인하고, 너의 최선을 선보였다.

「내가 너의 『담당 트레이너』가, 너의 『협력자』가 되게 해줘!」

마지막 빛을 태우는 태양도, 내 약 때문에 황록색으로 발광하는 네 다리도 모두 네 눈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꼴을 한 채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스카우트나 레이스를 모두 거부한 내가, 떠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망발을 내뱉은 그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네가 내민 손을 나는 기꺼이 잡았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끝'을, 내가 보여주지, 모로보시 군.」

꿈을 꾸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비웃을 허무맹랑한 꿈을. 지금까지처럼 혼자가 아니라 너와 함께.

"그러니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선 정말로 유감을 표한다네, 아카네 군."

나는 말했다. 이에 너는 울었다. 이미 다 으스러진 발등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으며. 별 소용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너는 듣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알고 그 결과를 목도해도 최소한의 조치만은 끈질기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다 큰 어른임에도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억지를 부리며 우는 모습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게 퍽 우스웠다. 그런데 웃음은 나지 않았다. 발끝에 자꾸만 닿는 눈물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어쩔 수 없이 설탕을 가득 쌓은 찻잔에 뜨거운 홍차를 부었다. 몇 번 티스푼으로 저은 뒤 한 모금 마셨음에도 설탕이 덜 녹았는지 달지 않았다.

책상 위 작은 TV에서는 현실도 모른 채 사람들이 즐겁게 다음 일본 더비를 예상해 보며 떠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내 얼굴이었다. 사츠키상 당시의 레이스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며 홍차에 설탕을 2,3개 더 넣었다. 곧이어 같은 클래식급 우마무스메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포켓 군, 단츠 군, 페리 스팀 군. 유감스럽게도 카페는 다음 더비에 출전하지 않지만 이후 국화상 기대주로서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다. 아카네 군이 붕대를 감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다리를 앞뒤로 느리게 흔들었다.

"자네와 내가 보고 싶었던 그 '끝'은 아마 저 애들이 보여주겠지. 과연 어떨지 참으로 기대가 돼! 그동안 자네가 날 보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야~ 꽤 두근거리는군, 그래!"

"아니야."

울음에 젖어 어그러진 목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발 위로 눈물이 후드둑 떨어졌다.

"달라. 너랑 나랑은…"

그야 자네와 나는 인간과 우마무스메이니 다르겠지. 할 말이 쭉 생각났지만 홍차를 마시며 잠시 뒷말을 기다렸다. 배려가 무색하게 아카네 군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들기만 했다. 울고 있어서 그런지 눈빛이 무척이나 탁해져 있었다.

"만약 내가 말렸다면 달라졌을까."

"자네는 내가 뭘 숨기고 있었는지 모르지 않았나. 무엇보다 자네가 뭘 한다고 해도 내 다리 상태가 변하는 것도 아니지. 괜히 착각하지 말게. 이건 내가 판단해서 내린 선택이야."

"…응. 그렇지. 그래도…"

너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감던 붕대를 고정하고, 잠깐 내 발등 위에 이마를 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기도하듯이. 앞머리 때문인지 발등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슬쩍 발을 뒤로 빼려 하자 너는 구태여 발을 붙잡고 신발을 신겨 주었다. 숨을 길게 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가 꼿꼿하게 일어났다. 눈가가 붉지만 않았다면 울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태연해 보였다.

"곧 병원 예약 시간이야. 가자."

"정말 번거로운 일을 하는군, 자네는. 나는 당장 데이터 분석에 바쁜데도 말이지."

"내일 출주 무기한 정지 관련해서 기자회견도 있고, 건강이나 컨디션 정도는 내 말을 들어달라고 했잖아. 난 네 트레이너야. 아직은…"

"알겠네, 알겠어. 그런 표정 하지 말게."

의자에서 내려와 서자 너는 자연스럽게 다친 발 쪽에 섰다. 유난은. 이제야 웃음이 나오길래 낮게 소리 내 웃었더니 너도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플랜B의 전망은 밝다. 사츠키상에서 유의미한 잔광도 남겼고, 그 빛을 따라올 우수한 우마무스메들도 있다. 이대로 가면 된다. 이대로, 끝을 향해… 네 팔을 붙잡고 한 발짝씩 내딛기 시작했다. 아직도 발등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로 유감이야, 타키온."

너는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올라간 서류 한 장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열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그런지 글자가 영 흐리게 보였다. 그런데도 딱 4글자만 또렷하게 보였다. 계약 해지. 어려운 한자도 아니건만 그 부분만 한 획, 한 획 시선으로 덧그리며 읽었다. 느리게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상처를 입은 발을 제외하면 오늘도 몸 상태에 이상은 없을 텐데도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건 복수인가?"

"아니야! 나 널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 이렇게 된 거엔 내 책임도 있고…"

"그렇다면 죄책감 때문인가? 어이, 어이. 그만두게. 그깟 감정 하나 때문에 우리의 목표를 놓아버릴 셈인가? 착각하지 말게. 레이스 출주를 멈춘 거지 실험은 끝나지 않았어! 여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를 생각하게! 이제 와서 나에게서 떨어지겠다는 생각은…!!! "

"타키온!!!"

귀에 비명 같은 이름이 꽂히고, 어깨가 꽉 붙잡혔다. 고개가 앞뒤로 흔들린다 싶더니 어느샌가 네가 바로 코앞에 와있었다. 나도 모르게 격앙되어 있던 건지 거친 숨이 네 얼굴을 덮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눈동자만큼은 나를 담고 있었다. 이전만큼 빛나진 않아도 한없이 올곧게. 말을 고르는 건지, 울음을 참는 건지 너는 입술을 한 번 지그시 깨물고 나서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진정해. 일단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죄책감이 있단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계약 해지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야. 네가 퇴학 권고 받았던 거랑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돼."

"내 퇴학 권고? 아. 아아, 그런 건가…"

"출주를 무기한 정지한 것이지 은퇴는 아니라면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학원 측도 바보는 아니야. 레이스도, 트레이닝도 하지 않고 있는 우마무스메의 담당 트레이너라니. 그냥 둘 리 없잖아. 지금까지 담당으로 남아있을 수 있던 것도 최대한 배려를 받은 거야."

"그렇겠지. 그 회장은 나 때에도 그랬으니."

"그렇지만 이제 한계야. 학원 측은 나에게 담당 우마무스메와의 계약 해지랑 트레센 학원과의 계약 해지 중에 선택하라고 했어. 정말,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가능하면 계속 네 담당으로서…"

너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올곧던 눈도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또 우는 건가. 가만히 관찰했지만 너는 끝끝내 참아냈다. 울음을 목울대 너머로 넘기고, 입꼬리를 힘껏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미안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눈은 반달처럼 곱게 접혀있었지만, 그 위의 눈썹은 팔(八) 자로 처져 있었다. 너는 버틸 때 이런 표정을 하는 건가. 입을 벙긋거렸다가 네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그럴 계절이 아닌데도 손끝이 찼다. 한 번 힘주어 그것을 잡았다가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뭐어… 서류 하나로 끊어질 사이는 아니니까, 나와 자네는. 실질적인 조수 일은 계속해 주길 바라는데 가능한가?"

"가능해. …그렇게 말하고는 싶지만. 현실적으로 조금 힘들 것 같아. 우선은 학원의 트레이너로 남아있긴 해야 하니까 당분간은 이쪽 업무에 충실해야만 해."

"…새로운 우마무스메라도 스카우트해야 하나?"

흐르듯 질문이 나왔다. 너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숨과 함께 답변을 내놓았다.

"교관 트레이너 한 명이 임신 및 출산 휴가로 하반기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그 대타 일을 하게 될 거야. 가능하면 당분간은 담당 우마무스메를 맡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학원 측이 제안해 주더라고."

"G1 우마무스메를 배출한 트레이너에서 일반 수업을 하는 교관 트레이너가 되다니 엄청난 강등 아닌가?"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새로운 우마무스메를 스카우트하는 것도 실례니까. 애초에 내가 명예니, 뭐니 따지는 편도 아니고. 아무튼 이런 상황인데 이해해 줄 수 있어?"

"하나하나 묻지 말게. 이해라면 했어. 내가 아무리 괴짜라고 불려도 담당 트레이너가 학원에 쫓겨나는 걸 지켜보기만 할 무뢰한은 아닐세. 한동안은 약물 실험보다는 데이터 분석이 우선될 것 같으니 자네가 없다고 해도 실험에 큰 타격이 오는 것도 아니야."

"알았어. 그럼 학원 측에는 내가 말해둘게."

"그래."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렸다. 구겨진 서류를 손으로 밀어 펴고 볼펜을 들었다. 아그네스 타키온. 이름 옆에 서명하고 서류를 넘기자 너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고작 한 장짜리 서류를 한참 쳐다보더니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대로 너는 뒤돌았고, 나는 구태여 배웅하지 않았다. 들고 있는 홍차를 티스푼으로 계속 휘저어도 설탕이 도무지 녹지 않았다. 이런 용해도보다 많이 넣었나. 이런 실수를. 가라앉은 설탕을 떠보는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타키온.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뭐지?"

"기다릴게." 

달그락. 다소 뜬금없는 소리에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돌리니 네가 아직 나가지 않은 채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창문에 걸어 놓은 썬 캐쳐 때문에 네 얼굴 위로 프리즘 빛이 번졌다.

"아주 조금이라도 다시 달릴 마음이 든다면, 우리가 보고 싶었던 그 '끝'을 직접 보고 싶어진다면 바로 나를 찾아와."

"자네는 참 미련한 구석이 있어."

"알아. 그래도 기억해 줘."

너는 웃었다. 위태롭고도 아름답게. 푸른 눈을 똑바로 뜨고 내 기억 속에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너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다시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서류를 든 손은 등 뒤로 감춘 채 너는 느리게 몸을 틀었다. 닫지 않은 문으로 손이 흔들리며 사라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달렸다. 도쿄 레이스장을 벗어나 앞뒤 재지 않고 그저 빠르게. 각막에 새겨진 레이스 장면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며 뇌리를 태웠다. 뒤늦게 끓어오른 욕망과 질투, 그리고 본능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미 망가진 지 오래된 발과 거짓말만 내뱉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움직인다. 달릴 수 있다. 달리고 싶다. 그 끝을 보는 것은 나여야만 한다. 나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이 0만 아니라면! 

도심의 풍경이 빠르게 내 뒤로 넘어갔다. 항상 이 정도 속도로 선발 주자와의 간격을 유지하며, 동시에 후발 주자들을 견제했다. 상대, 마장 상태에 따라 최적의 위치를 잡고 잠시 숨을 고른다. 눈앞에는 코레마사 다리가 길게 뻗어있었다. 마지막 직선. 그래. 여기에서. 발로 힘차게 딱딱한 아스팔트를 박찼다. 잔디도, 더트도 아니기에 충격이 고스란히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강타했다. 이것이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사츠키상 때의 나는 이것보다 더 빨리 달렸다. 내가 원하는 끝은 이보다 한참 더 앞에 있다. 멀어져 가는 환상을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닿지 않아도. 힘껏 주먹을 쥐었다. 미처 자르지 못한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점점 속도를 올릴수록 바람이 거세게 온몸을 때렸다.

다리를 다 건넌 순간 발을 멈추었다. 제대로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2,400m를 돌파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해냈다. 이 거리를. 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스트레칭도 없이 오랫동안 굳어있던 몸을 끌고 나왔더니 피로감이 몹시도 묵직했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와 고개를 들고 거친 숨을 골랐다. 늦가을 하늘이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자동차 매연 냄새, 그리고 약간의 물 냄새가 났다. 땀이 기화되어 내 체온을 빼앗고, 생리적 현상으로 몸이 떨렸다.

"굉장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어느 사이인가 바로 옆에 검은 바이크 한 대가 서 있었다. 탑승자가 헬멧 바이저를 올리자마자 보인 것은 예상대로 푸른 눈동자였다. 너는 허겁지겁 헬멧을 벗고 산발이 된 머리를 드러냈다. 노을보다도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너…"

"다급하게 따라오느라 타임을 정확히 잴 순 없었지만 바이크로 아슬아슬하게 쫓을 정도였어! 아, 그래도 이 다리 시작점부터는 타임을 재봤는데 그 기록이…"

"왜 여기에 있지?"

말을 끊어버린 내 질문에 너는 눈을 끔벅이기만 했다. 그러다 이내 상기된 얼굴로 씩 웃어버리는 게 아닌가.

"기다린다고 했었잖아."

잊을 수 없는 그때가 지금 네 위에 겹쳐졌다. 시간도, 계절도, 상황도 모든 것이 다 달랐다. 딱 하나, 광기가 어려 푸른빛으로 산화하는 네 눈만이 똑같았다.

"음, 이래서는 기다린 게 아니라 찾아온 게 되지만 아무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응?"

"나는 분명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고 했었어. 트레이너였던 자네에게만큼은 내 몸 상태를 알려주기도 했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네만은 내 레이스 복귀가 요원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나. 설사 회복해서 복귀한다고 해도 이전과 같이 달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 그런데도 어째서 날…"

"그래도 달리고 싶지?"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며 너는 바이크에서 내렸다. 바이크 사이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스포츠 드링크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받아서 들었다. 산 지 꽤 되었는지 미지근했다.

"나도 똑같아. 네가 달리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야."

"겨우 그런 걸로…"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해?"

네 목소리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너는 지척까지 다가오더니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톡톡 닿는 손길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레이스 성적이 어떠하든, 기록이 어떠하든, 세간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나에게 있어 『최강의 우마무스메』는 여전히 아그네스 타키온, 너야."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을 무력하게 들었다. 너는 몸을 살짝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눈밖에 없었다. 그 위로 답지 않게 멍한 내 모습이 비쳤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 '끝'을 넘어서는 걸 보고 싶어. 물론 너만 괜찮다면."

광기에 물들어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목이 메 입을 벙긋거렸다. 끝끝내 나오는 것은 웃음이었다. 배를 붙잡고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심박수를 재보지 않아도 귓가에 심장 소리가 선명하여 평소보다 빠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너는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너와 내가 만나 대체 무슨 반응이 일어난 걸까. 그리고 이것을 너는 무엇이라 부를까. 당장 나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을 쭉 늘어놓다가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우선 지금 할 게 따로 있지 않은가.

"모로보시 아카네 군."

익숙한 이름을 몹시 오랜만에 입에 담았다. 쥐고 있던 손을 네 앞에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선연했다.

"다시 한번 내가 자네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자네의 『꿈』이 되게 해줄 건가?"

너는 웃었다. 시원스레 소리까지 내면서.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까지 맺힐 정도였다. 너는 가만히 숨을 고르더니 내 손 위에 네 손을 겹쳤다. 손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무슨 소리야? 이미 오래전부터 너는 내 꿈인걸."

 



"타키온!!!"

날 부르는 외침에 번뜩 눈이 떠졌다. 네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자 덮고 있던 담요가 미끄러지며 붕대 대신 하얀 양말을 신고 있는 발이 드러났다. 일순 사고가 멈췄다.

"실험 중에 억지로 깨워서 미안해. 하지만 어쩐지 상태가 이상해서… 괜찮아? 119 부를까?"

"너는…"

"앗, 혹시, 설마…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아그네스 타키온이고, 그리고 여긴… 연구실이군."

"가장 최근 기억은?"

"재팬컵을 보고…"

"재팬컵? 국화상도 출전하기 전인데? 꿈에서 봤어?"

"…꿈?"

벼락같은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발에 들러붙던 고통도, 코끝에 감돌던 물 내음도 아직도 생생했다. 실험으로 말미암아 내 무의식이 꿈에서 발현되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세세하고 생생하다.

"꿈이란 말인가? 그게?"

"타키온?"

내 안색을 살피는 너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앉아 있었을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고, 네 몸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네가 반사적으로 팔로 침대를 짚었을 땐 서로의 이마가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지근거리에서 네 눈을 살펴보았다. 울지 않아 눈가가 붉지도 않았고, 눈빛이 탁해져 있지도 않았다. 그런 낌새 하나 없이 당황스러워 연신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 하늘을 닮은 눈은 여전히 청명했다. 목소리에 열감과 웃음이 섞인다.

"…잠깐 달리고 오지."

"뭐?! 갑자기? 자, 잠시만! 기다려!"

네 팔 아래로 몸을 뺀 뒤 근처에 있던 신발에 대충 발을 꿰어 넣고선 그대로 창문을 넘었다. 뒤에서 몇 번이고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그대로 달렸다. 아래로 쭉 내려가자 트레이닝 때 쓰는 운동장이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스카우트를 받은 날 달린 곳도 이 운동장이었다. 그날의 기억과 꿈속의 감각을 현재와 비교하며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다르다. 그 어느 때와는. 언제 발이 부러질지 알 수 없어 오는 불안감도, 이미 으스러져 달릴 때마다 찔려오던 고통도 없다. 오로지 스피드에 대한 쾌감만이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주마등처럼 익숙한 학교 풍경과 함께 지난 실험과 검증들이 내 뒤로 지나간다. 그래, 플랜A는 기어코 성공했다. 그 여름날, 푸른 바다 앞에서, 너와. 0에 가깝던 가능성은 확정된 현실을 가져왔다.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럼에도 내가 목표로 하는 '끝'은 저 앞에 있다. 아직도 닿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이 정도는 되어야 쫓을 마음이 드는 법 아니겠는가! 마지막 코너를 지나 직선 구간이 보이자 힘껏 지면을 박찼다. 내 발 모양대로 땅이 음푹 패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기세 그대로 속도로 승화된다.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몸에 가해지는 부하를 기꺼이 맞았다. 플랜 A의 전망은 밝다. 내 육체도 보강되었고, 그걸 증명할 레이스도 남아있다. 당장은 넘어설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 조금만 더. 힘껏 손을 뻗었다가 골 지점을 지나는 순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조금씩 속도를 죽이며 차츰 숨을 골랐다. 체감상 2,000m에서 2,400m 정도를 뛰었을까. 타임을 재보진 못했지만 마지막 스퍼트나 남은 체력 등 몸을 풀지도 않고 움직인 거치고는 꽤 나쁘지 않다. 허리에 손을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가을 태양은 여름을 잊지 못했다는 것처럼 쨍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굉장해!"

아주 당연하게 따라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붉은 머리를 꼬리처럼 휘날리며 달려온 너는 내 바로 옆에서 거친 숨과 말을 번갈아 뱉었다.

"헉… 다급하게 따라오느라 타임을 정확히 잴 순 없었지만… 허억… 미안, 잠시만. 후우… 딱 보기에도 엄청난 속도였어! 네가 그렇게 뛰는 건 처음 봐… 아, 그래도 마지막 직선 구간만은 타임을 재봤는데 그 기록이…"

"아카네 군은."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자 너는 입을 곧바로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에 웃음기가 올라왔다.

"정말로 한결같군."

"…칭찬이야? 욕이야?"

"아하하! 뭐든 상관없지 않나!"

"앗! 교복 입은 채로 누워버리면 어떡해!"

잔소리 따윈 신경도 쓰지도 않고 운동장에 드러누웠다. 실험으로 누워있는 동안 백의도 벗어두고 있었기에 팔, 다리에 잔디가 직접 닿아 간지러웠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잔디 냄새도 퍽 괜찮았다. 안구가 건조해져 눈을 의식적으로 깜박이고 있을 때 시야에 불쑥 뭔가가 들어왔다. 스포츠음료인가. 결로 현상으로 맺혀있던 물방울이 볼 위로 톡 떨어졌다.

"자."

"아아, 고맙네."

상체만 일으키고 음료를 받았다. 그 와중에 언제 챙긴 걸까. 방금 막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시원했다. 뚜껑을 따고 몇 모금 마시는 그 일련의 과정을 너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갑자기 왜 뛴 거야?"

"별거 아닐세. 갑자기 달리고 싶어져서 말이지."

"그런… 평범한 우마무스메 같은…"

"나는 언제나 우마무스메였다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순간 깨달았다. 꿈속의 내가 다시 달린 이유, 지금의 내가 기어코 플랜A를 강행한 이유는.

"그래, 나는 우마무스메지."

네 말이 맞았다.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하진 않다. 내가 우마무스메고, 달리기를 향한 본능과 마음이 날뛰는 이상 달릴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친다. 살짝 눈꺼풀을 덮었다. 아까 꿈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달려서 그런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맥박이 그대로 나타나는 위치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아카네 군?"

"아니… 열이라도 있나 해서. 이마는 네가 만지는 걸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이 목으로라도 재보려고."

"자네 은근히 날 보는 시선이 너무하지 않나?"

"새로운 실험 약 먹고 자다가 갑자기 눈물 흘리고선 뛰쳐나가잖아. 걱정할 만하지. 으음. 이 정도면 그냥 달려서 난 열인가?"

너는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다가 손을 내 목에서 떼고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타키온, 오늘 실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응?"

"그러지."

"그렇게 말하지 말고. 건강이나 컨디션은 내 말을… 응? 어? 뭐?"

너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내가 손을 잡자 곧바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치마를 탁탁 털면서 보니 하얀 치맛단에 초록 물이 베어져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한 번 기지개를 쭉 켠 후 짐짓 허리에 손을 얹었다.

"자네 말대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어. 으음, 달렸더니 출출하군. 뭔가 달콤한 것이라도 먹으러 갈까! 자, 안내하게."

"내가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럼! 자네 말고 나를 누가 데리고 간다는 건가! 자, 자!"

"아, 알겠어. 일단 갈 데 찾아볼 테니까 그사이에 씻고 옷 갈아입고 와."

"번거롭군. 그냥 가면 안 되나?"

"너 지금 땀 엄청나! 그냥 이대로 식게 둘 수도 없고 안 돼! 제대로 쿨링 다운하고 나갈 준비 해!"

"아니지. 굳이 나갈 필요 없이 자네가 직접 만들어서 주면 되지 않은가!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달콤한 걸 만들어주게. 디저트나 홍차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해도 괜찮으니."

"내 번거로움은 상관없어?! 그보다 쿨링 다운이랑 샤워는 하고 와!"

웃음을 흩뿌리며 달아나자 곧바로 달음박질 소리가 뒤에 따라왔다. 그것이 몹시 흡족했다. 인간인 네가 계속 따라올 수 있도록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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