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Restart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10,646자

 


 

24시, 혹은 0시. 초침 한 번으로 서로 다른 시간과 날짜가 공존하고 변하는 시간. 시계처럼 아카네의 핸드폰이 12번 울렸다. 11월 29일. 그의 생일을 맞아 축하의 말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걸 알림 삼아 깨어나듯 책에서 눈을 뗀 아카네가 슬며시 웃었다. 월말에 가깝다 보니 쌓여가는 생일 메시지를 보다 보면 올해도 괜찮게 보냈다는 감상이 들었다. 아카네는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스마트폰을 챙겨 침대로 향했다. 형광등은 끄고, 협탁에 올려둔 향초에 불을 붙였다. 빛과 함께 피어오르는 향을 즐기며 침대에 앉아 아카네는 뒤늦게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동기, 고향 친구, 가족… 역순으로 쌓여있는 이름들을 쭉 내리던 엄지손가락이 일순 멈추었다. 타키온. 자신의 담당 우마무스메. 제일 먼저 연락을 해줬구나. 아카네는 아무도 보지 않건만 히죽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아카네 군, 일어나는 대로 곧장 연구실로 오게나.]

 

김빠지는 소리가 나며 촛불이 흔들렸다.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아카네는 그 짧은 문장을 연거푸 읽었다. 11시 59분. 다시 보니 어제 온 거였다. 날짜가 다르니 생일 축하가 아니라고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최근 타키온은 어떤 연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날짜가 바뀌었는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그래도 안 챙겨준 적은 없었는데. 답장하려던 엄지손가락이 자꾸만 허공을 맴돌았다.

 

“나 왜 이래. 유치하게, 진짜…”

 

[알았어. 이따 보자.]

 

짧은 답을 남기고 아카네는 촛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이 방을 뒤덮고, 옅은 향기만이 그 곁에 남았다. 더듬거리며 아카네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겨울용이라 두툼한데도 차갑기만 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핸드폰이 울렸지만 아카네는 눈을 꼭 감았다. 일어나는 대로. 그 말이 평소보다 일찍 오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기에. 어쩐지 잠이 오진 않았지만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하네.]

 

그 때문에 타키온의 생일 축하를 몇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한 아카네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어서 오게나, 아카네 군! 기다리고 있었네!”

 

“어, 어. 안녕, 타키온. 그런데…”

 

아카네는 말을 끊고 발 폭을 크게 벌려 성큼성큼 타키온에게 다가갔다. 타키온은 그런 아카네를 의자에 앉은 채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아침부터 이상하리만치 텐션이 높다. 실험이나 연구가 잘 풀렸을 때 타키온이 혼자 신나 하는 건 곧잘 있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에 아카네가 허리를 숙여 찬찬히 타키온을 살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선명히 보였다.

 

“…타키온 혹시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글쎄. 자네에게 연락하고 나갔으니 12시는 넘었겠군.”

 

“뭐? 통금에 걸리지 않게 내가 바래다줬는데도 굳이 여기 다시 돌아와서 밤을 새웠다고?”

 

“어쩔 수 없었네. 시간이 촉박했거든. 소위 말하는 서프라이즈를 위해선 자네에게도 감춰야 했고. 하하! 아마 오늘이 자네의 짧은 인생 중 가장 특별한 생일이 될 걸세! 내 장담하지!”

 

“나보다 어린 너한테 짧은 인생 소리 들어도 말이지… 그래서? 뭘 준비했는데?”

 

타키온의 입꼬리가 기고만장하게 올라가고, 그에 반비례해서 아카네의 눈썹이 처졌다. 타키온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다. 주춤 오른발이 뒤로 빠질 때 타키온이 불쑥 플라스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모로보시 아카네 생일 기념 육체 개조 실험일세!”

 

“평소에 늘 하던 거잖아!”

 

“아니! 무슨 소리인가! 다르네!”

 

진짜 억울한지 타키온은 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벌려져 있던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타키온이 아카네의 손을 붙잡았다. 뿌리칠 겨를도, 마음도 없이 서로의 손이 얽히며 플라스크가 아카네 손에 쥐어졌다.

 

“이건 바로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니까.”

 

타키온의 말에 아카네는 저도 모르게 침을 한 번 삼켰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에서 도망치듯 시선을 그대로 내리자 플라스크에 자신의 눈이 비쳤다. 투명하고 붉은 액체 때문에 자신의 눈도 꼭 타키온과 똑같아진 것 같았다. 플라스크 병을 조심히 들고 아카네가 반걸음 물러섰다. 약물이 아카네의 맘 따라 일렁거렸다. 아카네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일부러 무심한 목소리를 냈다.

 

“어… 숙면할 수 있는 약이야?”

 

“그러면 그냥 평범한 수면제 아닌가!”

 

“그렇지만 예전에 어려졌을 때 그 소리 듣고 먹은 약이 수면제였잖아.”

 

“오늘 건 그때와 차원이 다르네! 자자, 어서 쭉 들이키게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한데…”

 

아카네가 와인처럼 플라스크를 부드럽게 돌렸다. 약에서부터 올라오는 달큰한 향기가 아카네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타키온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떠드는 걸 좋아하는지라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약에 대한 설명은 꼭 따라왔다. 그런 타키온이 꿈을 이룬다는 추상적인 말만 하고 그 뒤가 없다니. 아카네는 불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차가운 플라스크 표면을 제 입술에 갖다 댔다. 어차피 자신에게 안 마신다는 선택지란 없다. 잠시 멈춰있던 아카네는 이내 각오를 굳히고 약물을 들이켰다. 달콤한 향과 다르게 식도가 다 화끈거렸다.

 

“으, 뭔가 엄청 독한 과일주를 먹은 것 같네.”

 

“그런가. 자! 다 마셨으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눕게!”

 

“누워? 왜?”

 

“곧 알게 될 걸세.”

 

타키온이 간이침대를 자진해서 펼치고는 그 위를 탕탕 두드렸다. 영 불길한 것을 다 보겠다는 것처럼 아카네는 표정을 구기면서도 얌전히 그 위에 누웠다. 아예 담요까지 꼼꼼히 덮어주는 통에 접힌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뭔데, 대체… 뭐라도 좀 알려줘…”

 

“후후, 모처럼의 서프라이즈인데 그럴 순 없지! 즐거움으로 남겨두게.”

 

“아니, 내가 아는 서프라이즈랑 달라도 너무 달라서 무섭… 컥!”

 

쿵. 뇌와 심장이 동시에 울렸다. 위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들끓더니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카네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손으로 심장 부근을 쥐어뜯으려 하자 타키온이 그 손을 붙잡고 강제로 떼어냈다. 다른 쪽 손가락으로 손목을 지그시 누르는 걸 보니 이 와중에 맥을 짚는 모양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시야만은 또렷했다. 타키온은 다소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아카네를 진득이 관찰하고 있었다. 붉은 눈 한 가운데에 박힌 동공도, 살랑살랑 움직이는 머리카락 한 올도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여 무서울 지경이었다. 쏟아지는 정보의 양에 아카네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니 다른 감각들이 선명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간이침대가 삐그덕 울고, 입에는 단맛이 여전히 감도며, 부유하는 공기 중에선 겨울 특유의 찬 내가 났다. 그리고 타키온의 손은 따뜻했다. 아카네는 끓는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발끝으로 침대를 긁었다.

 

“흠. 전신에 작용하는 약인 만큼 이번 것도 부작용이 크군. 맥박 상승, 과호흡, 미열… 근육 수축에 따라 통각도 있나 보군. 이런, 이건 좀 미안하게 됐네, 아카네군.”

 

“타, 타키온…!”

 

“그래. 여기 있네.”

 

이제 맥은 잴 필요가 없는지 타키온이 손목에서 손을 떼고 아카네의 이마를 쓸었다.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손길이 부드러웠다. 타키온은 땀을 훔쳐내며 아카네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댔다. 그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닿아 아카네가 움찔거리자 타키온은 낮게 웃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게나.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 질 걸세.”

 

이상한 일이었다. 온몸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그 속삭임이 마법이라도 되었는지 아카네는 천천히 수면 아래로 빠져들었다.


 

“아카네 군. 아카네 군!”

 

“으윽…”

 

“얼른 일어나게! 일생 최대의 순간을 그냥 누워서 보낼 셈인가!”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불평은 됐으니 이거나 보게나! 자!”

 

갑작스레 날아든 빛에 아카네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서 막았다.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그의 눈앞에는 작은 손거울이 있었다. 형광등 빛이 거울에 반사된 모양이었다. 아카네는 타키온에게서 거울을 받아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몸부림쳐서 그런지 단정히 묶었던 머리는 풀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머리핀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간 뒤였다. 땀 때문에 엉망진창 얼굴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꼴을 보니 한숨이 새 나갔다.

 

“뭘 보라는 거야… 엉망인 내 꼴?”

 

아카네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당연히 귀에 걸쳐져야 할 것이 손을 떼자마자 스르륵 떨어졌다. 당황한 손이 볼 뒤를 계속 더듬었다. 없다.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어?”

 

“후후, 내가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타키온은 손거울을 다시 빼앗아 들더니 조금 멀리서 아카네를 비추었다. 아까와 똑같이 빛이 반사되었지만, 아까와 달리 아카네는 눈을 가리거니 감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자기 머리 위에서 작긴 해도 우마무스메와 똑같이 생긴 귀가 달려 있었으니까. 아카네는 손을 들어 자신의 귀 같은 것을 만졌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동시에 어설픈 손길에 간지럽다. 꿈이라고 하기엔 손과 귀 양쪽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촉감에 아카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 설마. 내 꿈이라고 했던 게…”

 

“실험은 성공일세! 인간이 우마무스메가 되는 약이기에 사전 실험을 할 수 없는 점이 위험 요인이었는데 다행히 잘 되었어. 자, 어서 감상을 말해보도록 하게. 지금 기분이 어떻지?”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지금 자네의 평생의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그 반응은 뭔가?! 좀 더 다른 게 있을 것 아닌가. 감격스럽다든가, 두근두근 이라든가. 짧고 가벼운 어휘라도 괜찮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그렇지만 실감이 안 나는걸…”

 

거울 속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카네는 엉망으로 묶여있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를 빗어 내리는 내내 귀가 위아래로 쫑긋거렸다. 움직이는 감각은 들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있어 보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니 영 어색하기만 했다. 설마 꼬리도? 문득 든 생각에 아카네는 담요를 걷고 조심스레 발바닥을 바닥에 댔다. 타키온도 어서 일어나라는 건지 옆으로 피해주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느낌은 의외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등에 손을 대자 꼬리가 바지를 약간 아래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솟아있었다. 손이 닿자 놀란 꼬리가 바짝 섰다. 좀 전에 빗던 머리카락과 감촉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아카네는 떫은 미소를 지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푼 후, 발 앞꿈치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편자도, 신발도 없는 발로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쉰 아카네가 타키온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달려봐야 뭐라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 아하하하! 그런가! 그렇군! 자네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타키온은 웃음을 흩뿌리며 연구실 구석으로 가더니 신발 두 켤레를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신발 사이즈 다를 텐데 일부러 빌려온 걸까. 제대로 절차 밟고 빌려온 거 맞을까. 또 다른 불안이 아카네의 마음속에 싹텄지만, 바닥을 두드리는 편자 소리에 날아갔다. 딱 봐도 자기 발에 맞는 운동화가 발 바로 앞에 있었다. 흘끔 타키온을 보자 그는 먼저 운동화에 발을 꿰어 넣고 있었다. 아카네가 머뭇거리며 발을 들자 그를 향해 하얀 손가락이 커튼처럼 차르륵 펼쳐졌다.

 

“달리러 가지, 함께.”


 

11월 29일. 지금 당장은 해가 있긴 하지만 전날 눈이 왔기에 잔디 상태는 불량. 심지어 4시경에 비나 눈이 예상되어 있어 다들 야외 트레이닝은 피해 실내로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한산한 운동장을 두 우마무스메가 가로질렀다. 어울리지 않게 체육복에 달린 트레이너 배지가 약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잔디에 쌓인 눈보다도 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둘의 뺨만은 불그스름했다.

 

“트윙클 시리즈에서의 첫날. VR에서 자네가 잠재 뇌 기능을 반영한 우마무스메의 육체를 조작한 적이 있었지. 몇 년 전의 데이터라 현재의 자네와 차이가 있을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후 재측정하면 될 테니 큰 문제는 안 되려나. VR로 구현한 신체와 약물로 재현한 신체의 차이는 어떠할 지 이 또한 흥미롭군!”

 

“생일 축하니, 내 꿈이니 했지만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건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친애하는 모르모트를 위해 내 귀중한 시간을 들여 어떻게든 자네의 생일날 완성을 시켰건만!”

 

“아, 알았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무튼 그래서 얼마나 달리면 돼?”

 

“기본적인 신체 기능 측정은 했지만, 자네의 달리기가 어느 정도일 지는 나로서도 미지수이네. 더군다나 현재까지와 다른 육체를 쓰는 만큼 처음에 무리하면 부상 위험도 높아. 잔디 상태도 좋지 않으니 말이지. 그러니 일단 차분하게 갈까. 우선 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따라서 뛰어보게. 서서히 속도를 높일 것이니. 자네 상태를 확인한 후에 거리를 지정하여 기록을 측정하지.”

 

“알았어.”

 

“심전위, 심박, 호흡, 근전위 측정·기록! 하하하! 자네 지금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 건가. 뛰기도 전에 심장이 엄청 뛰고 있군!”

 

“그런 건 말로 안 해도 알아…”

 

아카네는 민망스레 양 뺨을 감싸면서도 착실히 자세를 잡았다. 아카네가 타키온의 실험에 참여한 것도 3년 차. 어설프게 허둥지둥 달리던 초반과 다르게 이제는 제법 각이 잡혀 있는 것을 보고 타키온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발목을 풀어주고 타키온이 그 옆에 섰다. 아카네는 시선은 정확히 타키온의 옆얼굴에 꽂혀 있었다. 언제나 혼자 여유로운 척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그의 인상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아카네는 타키온의 달리기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많이 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표정을 이렇게까지 지근거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짝 선 눈썹을 마음속으로 덧그리며 아카네가 숨을 삼켰다.

 

사전에 정해준 시작 구호는 없었다. 그럼에도 둘 다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타키온이 한 번 턱을 당겼을 때. 둘은 거의 동시에 출발했다. 타키온이 능숙하게 코스를 잡고, 아카네는 그 등을 바라보는 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우선 1마신 차. 하얗기만 하던 운동장에 둘의 편자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처음에는 인간이어도 따라 잡을 수 있는 속도로 느긋이. 반 바퀴를 돌았을 때 타키온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이 정도는 일상이라는 것처럼 차분히 따라오는 아카네를 보고 히죽 웃더니 단숨에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우마무스메의 평균 속도까지. 점점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아카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빠르다. 아카네가 우마무스메로서 달리게 된 첫 감상은 그게 다였다. 심지어 생략된 주어는 타키온이었다. 일단은 같은 우마무스메일 터인데도 차이가 왜 이리 극심한지. 타키온이 흩뿌리는 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카네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과 우마무스메의 달리는 자세엔 차이가 있다. 꼿꼿하게 축을 세우는 인간과 달리 우마무스메는 상체가 쏟아질 듯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숙인다. 이론은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아카네는 힘차게 대지를 박찼다. 꼿꼿했던 허리가 점차 앞으로 기울어졌다. 어설프게 폼을 따라 한 것이니 타키온처럼 깔끔하진 않다. 그럼에도 확연하게 속도가 달라졌다.

 

“와!”

 

저절로 아카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VR에서의 경험은 실제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폼을 바꾸자마자 다리에 실리는 부하가 묵직해지고,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아카네의 뒤로 넘어간다. 옅은 햇빛, 편자 소리, 주위 풍경, 차디찬 공기, 잔디 냄새… 유일하게 타키온의 등만이 저 앞에 있었다.

 

“어이! 아카네군! 여전히 느리지 않은가!”

 

“조금만 기다려줘!”

 

“싫네. 알아서 따라오게나.”

 

“하하! 진짜 못 말리겠다니까!”

 

호쾌한 웃음소리에 타키온은 뒤로 시선을 던졌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보이는 거라곤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뿐이었다. 힘든 것인지 아카네는 지면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앞을 제대로 안 보면 다칠 텐데. 우려심에 타키온이 입을 연 순간 고개가 홱 들렸다. 아카네는 웃고 있었다.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푸른 눈은 스카우트를 한 날과 똑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보며 타키온은 따라 웃었다. 그러고선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더욱 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불가능해 보일수록 무아몽중으로 목표만을 쫓는 게 바로 모로보시 아카네니까.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멀리멀리 달려 나갔다.

 

한 2,000m를 돌파하자 타키온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아카네는 타키온을 보고 급하게 멈추었다. 정확히는 멈추려다가 눈에 미끄러져 그대로 엎어졌다. 타키온은 눈대중으로 자신과 아카네의 거리를 짐작했다. 약 7마신 차. 타키온이 선 채로 턱을 짚는 사이, 아카네가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질척한 흙이 그의 팔다리에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화려하게 넘어졌군. 다친 데는 없나?”

 

“헉… 헉… 응…”

 

“흠. 신체 능력은 그때 당시 VR에서 구현한 것보다 떨어지는군. 지금은 데뷔를 앞둔, 아니지. 이제 겨우 데뷔를 한 우마무스메 정도인가. VR에서는 나이를 감안해서 계산했으나, 실제 육체는 막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거기서 차이가 발생한 걸 수도 있겠어. 좋아. 아카네 군 다음은…”

 

타키온의 말을 끊은 것은 그 어떤 말도, 불청객도 아니었다. 조용히 서 있는 아카네의 모습이었다. 아카네는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과 운동장에 남은 편자 자국을 마냥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펴보거나,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기도 했다. 흥분으로 거칠어졌던 호흡은 좀처럼 진정될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건지. 타키온은 당장 지금 기분이 어떤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은 참았다. 그가 이토록 즐거워하는 건 처음 보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아카네의 반응을 관찰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카네가 먼저 타키온에게 뛰어갔으니. 그녀는 본인 얼굴에 흙이 묻은 지도 모르고 방긋 웃었다.

 

“타키온!”

 

“말해보게.”

 

“이거, 엄청나다.”

 

“후후, 그런가.”

 

“정말…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왜 우마무스메에게 달리기가 본능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아. 이렇게나 빠른데 달리지 않는 게 이상하지. 우리가 쫓는 「한계의 너머」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실감이 나. 아아, 이런 생각 따위 다 제쳐두고 지금 내 감정만 말해보자면…”

 

아카네는 잠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기도하는 것처럼 양손을 모았다. 살포시 눈을 감자 방금 뛸 때 본 풍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두근두근 손 아래에선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닐세. 현실이지.”

 

볼에 닿는 감촉에 아카네는 번뜩 눈을 떴다. 타키온이 자신 못지않게 들뜬 표정으로 제 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꼬집기라도 할 심산인가. 피하지도 않고 타키온이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으려니 타키온은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쓱 훑고 곧장 손을 뗐다. 엄지손가락에는 거무죽죽한 흙이 묻어있었다.

 

“이번엔 레이스처럼 뛰어보도록 하지. 거리는… 그래, 1,600m로 할까.”

 

“마일? 너하곤 안 맞는 거리잖아.”

 

“자네한테 맞춘 거니까 말이지. 중거리는 인간 몸으로도 뛰어 봤으니 나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자네는 더 짧은 거리가 맞을 것 같네. 내가 앞서서 뛸 테니 그 뒤에서 페이스를 잡게. 마지막에는 나를 따라잡겠다는 심산으로 뛰게나.”

 

“알겠어.”

 

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그 누구도 조금만 더 쉬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겨우 예열이 된 양 굴었다. 둘은 목을 꺾거나 어깨를 돌리는 식으로 각자 몸을 풀며 다시금 출발선에 섰다.

 

“제자리에 서서.”

 

몸풀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타키온이 준비 신호를 던졌다. 비록 연습이지만 레이스. 그 실감이 들기 시작하며 아카네의 전신에 긴장에 뻗어 나갔다. 오른발이 더 뒤로 빠지며 땅이 얕게 패였다. 타키온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고, 흔한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준비 땅. 둘 다 동시에 달려 나가서 깔끔한 스타트를 끊었다.

 

선두에 선 것은 이번에도 타키온이었다. 능숙하게 안쪽 코스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타키온의 시야각에선 머리카락 한 올 발견되지 않았다. 타키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바로 내 뒤에 있나. 아카네는 가까운 거리 탓에 자꾸만 날아드는 흙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트레이닝은 본의 아니게 꾸준히 하고 있으나, 타키온이 확언한 대로 현역에 견줄 신체 능력은 없다. 항상 혼자 뛰기만 했으니 레이스 경험도, 깔끔한 폼도 없다. 그나마 자신 있게 내놓을 거라고는 트레이너로서 가진 지식뿐. 아카네는 상체를 서서히 숙이면서도 눈은 앞에 고정했다. 타키온이 그를 떨쳐내기 위해 좌우로 움직여도 봤지만, 아카네는 끈질기게 그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집요함에 타키온이 남몰래 웃었다.

 

마지막 코너. 타키온이 인코스로 가파르게 코너를 파고든 반면, 아카네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아웃코스로 밀려났다. 멀어져 가는 붉은 머리칼을 훔쳐본 타키온이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 적성에 비해 확연히 짧은 거리라 속도가 제대로 나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이걸로 충분할 터였다. 아카네를 이기는 데에는.

 

“흐아압!!!“

 

괴성과 함께 바람이 나부꼈다. 아웃코스로 밀려난 대로 아카네는 올곧게 직선 코스로 달려들었다. 타키온의 페이스에 맞춰 따라오느라 남은 체력은 얼마 없을 텐데 그마저도 모조리 불사르겠다는 각오로 대지를 박찼다. 코너에서 벌어진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4마신에서 3마신, 3마신에서 2마신.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타키온은 작은 전율을 느꼈다. 여유 부리다간 정말로 진다. 그런 확신이 머리를 강타했다. 2마신에서 1마신, 그리고 종국에 아카네는 타키온과 나란히 섰다. 그대로 둘이 얽히듯이 골인. 카메라 판독이 불가한 상황이지만 둘 다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스태미나가 떨어진 아카네가 허리를 펴고 말았고 근소한 차이로 타키온이 이겼다는 것을. 타키온은 먼저 주저앉은 아카네를 두고 조금 더 멀어져서야 겨우 멈추었다. 그는 즐겁게 두 팔을 펼쳤다.

 

“아하하하! 정말 굉장하군, 자네는! 아무리 내 적성에 맞지 않은 거리고, 내가 봐주었다고 해도 이쪽은 현역인데! 그런데 마지막에 나를 따라잡는다고? 이것 참! 그 몰입과 광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가능만 하다면 자네의 뇌를 열어보고 싶은 지경인걸!”

 

지금쯤 농담이라도 끔찍한 소리는 말라는 잔소리나, 흥분으로 가득 찬 웃음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정적만이 타키온을 감싸자 그는 몸을 틀었다. 자신보다 큰 아카네가 바로 보이지 않아 시선을 내려보니 아카네는 쪼그려 앉아 있었다. 스태미나가 떨어져서 지친 건가. 그렇다 하기에는 무언가가 이상했다. 둥글게 말린 어깨가 들썽거리고 있다. 타키온은 한 발짝씩 아카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다리를 가리고 있던 등을 지나치자 그제야 발이 보였다. 떨리는 양손으로 감싸 쥔 발이. 설마. 섬뜩 불온한 예감이 타키온의 뇌를 치고 지나갔다. 말 대신 입김만이 타키온의 입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타키온.”

 

시린 고요를 깨트린 건 청아한 목소리였다. 아카네는 허리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폈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있던 그녀가 짝다리를 짚은 것을 보고 타키온은 입을 다물었다. 온전히 지면을 닿지 않은 다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이내 아카네가 주먹을 꽉 쥐더니 이제껏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실험 중단해 줘.”


 

“발등 골절이래.”

 

아카네는 태연하게 보고했다. 왼쪽 발에는 구두나 운동화도 아니고, 반깁스를 신고. 그는 목발도 없이 절뚝거리며 걸어와 대기실에 있던 타키온 옆에 털썩 앉았다. 아카네에게서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 타키온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인간으로 돌아와도 뼈가 붙진 않는구나. 뭐, 당연한가.”

 

“정확히 어느 정도 부상이지? 회복까지 걸리는 기간은?”

 

“어… 5중골이었나? 아무튼 외곽 뼈에 금이 갔고, 일단 수술할 필요는 없대. 치료는 아마 4주에서 8주? 한동안 많이 부을 거니 다음 주에 부기 빠지고 다시 보자고 하시더라고. 통깁스로 바꿀 수도 있는데,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바로 조치했으니 반깁스로 쭉 갈 수도 있어.”

 

“그렇군.”

 

타키온은 딱 한 마디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타키온의 성격상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이번 건 단순 사고에 가까운데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아카네는 멀쩡한 다리를 흔들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까? 날이 추우니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으려나.”

 

“지금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인가?”

 

타키온이 으르렁거리며 아카네의 어깨를 붙들었다. 파고드는 통각에 아카네가 인상을 쓰자 타키온은 곧장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 틈 사이로 엿보이는 붉은 눈은 침잠하고 있었다.

 

“자네가 아무리 우마무스메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실제 육체를 쓰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는 걸 간과했어. 자네에게 우마무스메의 육체란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 아닌가. 힘을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감각이 아예 무지하지. 어린 우마무스메들에게 달리기 전 먼저 힘을 다루는 법부터 가르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인데. 다짜고짜 레이스를 했다니. 이래선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여 주었던 거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그 칼이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하지만 상대는 성인인데. 떠오른 반박에 타키온은 손을 내렸다. 자신보다 큰 트레이너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네 설마 알고도 일부러…”

 

“아냐, 아냐!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뭐… 마지막 스퍼트하려고 발을 딛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런데 대체 왜 도중에 멈추지 않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달렸지?”

 

“그야 당연히.”

 

또렷한 눈동자가 데굴 굴러 타키온을 고스란히 담았다.

 

“널 따라잡는다.”

 

타키온은 그 눈동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크기 때문일까. 위에서 비친 자신은 어쩐지 작아 보였다. 이내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멈출 수가 없었어. 멈출 만큼 심한 부상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네 옆에 서고 싶었거든. 이렇게 너랑 뛸 일도, 네 달리기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거의 없잖아. 이번 약효는 한 시간이었나? 짧았네. 정말.”

 

반쯤 중얼거리던 아카네는 돌연 두 손을 활짝 펴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튼 이건 흔히 있는 사고고, 따지자면 내가 자초한 일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해. 한동안 실험 참여가 어렵겠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돌아가서 밥 먹고 케이크나 먹자. 미리 사둔 게 있거든. 내 방에 가서 같이 먹자.”

 

먼저 일어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아카네를 보고 타키온은 기가 차 한숨을 뱉었다. 지금 그런 다리를 하고서 누굴 일으켜 주겠다는 건지. 타키온이 손을 잡지도 않고 알아서 일어나자 아카네는 민망하게 손을 뒤로 감추었다. 타키온은 그런 아카네 앞에 서더니 등을 보이게 쪼그려 앉았다.

 

“뭐야?”

 

“업히게.”

 

“아니, 그럴 필요는…”

 

“잔말 말고. 이럴 때는 내가 자네를 돌봐야 하지 않겠나.”

 

타키온이 도저히 물러설 것 같지 않아 아카네는 어쩔 수 없이 등에 제 몸을 기대고 목에 팔을 감았다. 이렇게 맞닿고 있으니 평소 티 나지 않았던 서로의 체격 차가 실감이 났다. 그 정도야 우마무스메에겐 우스울 지경이라 타키온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정신으로 업혀있는 아카네만 죽을 맛이었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는 타키온 목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정도를 모르고 움직이는 것 같으니 내가 통제해야겠어. 정말이지. 뇌가 위험하단 판단을 했으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으윽… 나도 반성하고 있어…”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찬 바람이 아카네의 맨 귀를 매만졌다. 어깨 너머로 앞을 훔쳐보니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온 거리가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만큼 색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생일 케이크 촛불도 못 붙였는데 크리스마스 조명을 먼저 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카네는 타키온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허리를 쭉 폈다. 머리 위에 있는 귀에 입을 가까이 댈 순 없었지만 말을 전하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타키온.”

 

“왜 그러지?”

 

“고마워.”

 

“…”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을 보냈어.”

 

“자네는 정말…”

 

타키온은 뭐라 하려다가 그저 아카네의 다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반깁스가 달랑거리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아카네 군은 실험 참여가 어렵다고 했지만, 아무튼 몸만 안 쓰면 되지 않나? 신체 회복력, 골밀도 등 여러 수식을 머릿속으로 늘어놓으면서도 입으로는 다정한 말을 건넸다.

 

“친애하는 모르모트를 위해 준비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새치기 견제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6,923자

 


 

아카네 군이 본가로 내려갔다. 나에게 사전 보고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이나 혼자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먼저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묻긴 했겠다만. 아카네 군은 지난번 쓰러지고선 본인도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잠시 재정비하고 오겠다고 했다. 집에 간다고 해결이 되는가. 이동에 따라 피로감이 더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나. 나로서는 의문투성이였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보내주었다. 자연스럽게 트레이닝도 잠시 정지. 자율 트레이닝이나 실험은 편하게 하라고 했다. 아마 본인도 말하면서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 말하면 내가 실험이나 할 거라는 걸. 그러니 그 뒤에 트레이너실에 먹을 거 남겨두었다는 말을 덧붙인 거겠지.

 

아카네 군이 없는 트레이너실 문을 열었다. 햇볕을 받아 먼지들이 허공을 부유했다. 사람 하나 없다고 공기가 꿉꿉하게 느껴져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열까 하다가 관두었다. 트레이너실에 비치되어 있던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안쪽에 있는 반찬통 3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용기가 투명해 내용물이 바로 보였다. 샐러드인가. 옆에는 당근 드레싱 통도 함께였다. 좀 더 제대로 된 식사 메뉴일 줄 알았다만. 하나만 꺼내어 투명한 통 너머를 이리저리 살폈다. 양상추, 채 썬 당근, 옥수수콘, 닭가슴살, 병아리콩, 삶은 달걀 따위가 통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한 면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갈아 먹지 말고 제대로 씹어 먹어.]

 

웃음이 나왔다. 너는 내가 전자레인지 등에 음식을 데워 먹을 위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한 거였군. 하나를 챙겨 아카네 군이 늘 있던 책상에 앉았다. 관점이 바뀌니 익숙했던 트레이너실도 다시 보인다. 참고 서적과 개인 파일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 끝엔 나와 닮은 인형이 3체 놓여 있었다. 2개는 내가 있을 때 뽑은 거니 나머지 하나는 기어코 따로 뽑은 건가. 내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는 아카네 군의 눈높이와 맞는 곳에 쭉 늘어져 있었다. 그 이력을 하나하나 훑으며 뚜껑을 열었다. 색색깔의 샐러드를 감추듯이 주황색 드레싱을 그 위에 뿌렸다. 포크를 통에 깊이 꽂고선 그대로 입에 집어넣으니 와삭 소리가 났다.

 

“차가워."

온도가 이렇게까지 미각에 영향을 끼치는 거였나. 드레싱을 잔뜩 뿌렸음에도 양상추도, 당근도 그다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란 참으로 귀찮은 행위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한다.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전 식사에 대한 기억을 반추해 볼 수록 흐뭇하게 날 바라보던 네 얼굴만 떠올랐다. 제대로 씹어 먹으라는 네 필체가 함께 메아리쳐서 맛도 없는 샐러드를 꾸역꾸역 먹어 치우고 있었다. 텅 빈 통은 그대로 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떴다.


눈을 문지르다 문득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이리 눈이 뻑뻑하나 했더니 앞에 있는 모니터 말고는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있었다. 카페는… 오늘은 트레이닝을 안 하는 날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샤커 군이라도 부르는 것을. 어느 누구 말 한마디 걸지 않은 채 연구에만 온전히 몰두한 건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아카네 군이든, 카페든 누군가가 중간중간 집중을 깨뜨려 주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바깥 역시 캄캄한 건 마찬가지였다. 쨍한 조명들 아래,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인영이 몇 명 있는 것을 보아하니 통금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항상 이 시간쯤 아카네 군이 데리러 왔으니 생체리듬상 자연스럽게 주의가 흐트러진 모양이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떡할까. 누구와 달리 바이크가 없긴 하지만 달리는 속력은 비슷하니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야 통금에 걸리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아직 하던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 가닥은 어느 정도 잡아두긴 했지만, 연구란 답을 직접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에 얼마나 걸릴 지도 미지수다. 진행한 것이 있으니 계속 끝까지 가볼 것인가, 흐름이 끊긴 김에 우선 돌아가고 추후를 도모할 것인가.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습관적으로 홍차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식어버린 지 오래된 홍차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아 마른 입술만 겨우 축였다.

 

그러고 보니 후지 군과 아카네 군은 서로 연락하던 사이였지. 통금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카네 군에게 연락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곤란하군.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곤란해? 어째서? 아카네 군을 따라 하듯 검지손가락으로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후지 군의 연락을 받으면 아카네 군은 분명 나에게 연락을 할 거고, 그건 연구에 방해되니까. 바로 타당한 이유가 떠올랐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게 문제라면 스마트폰을 꺼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건 또 내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책상 한쪽에 뒤집어 두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상단 바에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또 연구 중?]

 

도착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3시간 전이었다. 그 이전에는 방금 집에 도착했다거나 밥 먹었냐는 등 별 볼 일 없는 내용이 쌓여 있었다. 한참 동안 답장이 없으니 저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관둔 모양이다. 방해라고 생각한 걸까. 딱히 그렇지 않은데도. 스스로에게 모순을 느껴 턱을 괴었다. 일단 답장이라도 해둘까. 액정에 막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었을 때 돌연 화면이 검게 변하며 ‘모로보시 아카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에 눈썹이 움찔거린다. 여성, 20대, 다소 가벼운 톤, 불명확한 발음. 파편적인 정보나 줍는 대신 바로 질문을 던졌다.

 

“누구지?”

“응? 어? 어… 모로보시 네 아니에요?”

“모로보시는 이 핸드폰 주인일 텐데.”

“그건 그렇긴 한데 그…”

“뭐해?”

“아니, 너희 집에 미리 연락해 두려다가.”

 

스마트폰을 얼굴에서 뗐는지 목소리가 멀어졌다. 너 단축번호 1번 너네 집 번호 아니었냐는 질문만 희미하게 들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노이즈가 끼어든다 싶더니 이내 청아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여보세요?”

“아카네 군.”

“타키온?”

 

이름 뒤에 딸꾹질이 덧붙었다. 목소리도 묘하게 늘어지고 있어 한 번 찌푸려진 눈썹이 펴질 줄을 몰랐다.

 

“어라? 웬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 있어?”

“전화한 건 내가 아니다만.”

“으음? 내가 전화했던가?”

“자네도 아니… 잠시만, 지금 술 마신 건가?”

“으응. 조금. 친구 만나서. 오랜만에.”

 

어절이 뚝뚝 끊기고, 어순이 뒤죽박죽 섞인다. 대화에 맥락이 잘 잡히지 않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취했군. 헛숨이 터졌다. 아카네 군이 술을 마시긴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본인 방 냉장고에 맥주 캔이 있는 걸 보고 물은 적이 있으니. 어쩌다 한 번 마시는 거고, 평소엔 실험에 영향이 없도록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고 했던가. 여름 합숙 때 다른 트레이너들과 회식도 했던 것 같은데 주량이 좋은 건지, 알아서 조절한 건지 멀쩡하게 두 다리로 취한 이를 챙기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비록 목소리 뿐이어도 분명 흥미로워야 할 터인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나에게 연락이 더하지 않았던 게 단순히 친구를 만나 술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타키온.”

“왜 그러지?”

“응. 타키온.”

“왜 자꾸 부르는 거지? 이게 술주정이라는 건가? 멀쩡히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정말이지. 재정비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알코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진 않을텐데? 이래선 상태가 더 나빠질 것 같다만. 일단…”

“푸흐흐."

“갑자기 왜 웃지? 이것도 술 때문인가?”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아.”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이 꾹 다물렸다. 조용해진 나와 다르게 아카네 군은 자꾸 웃음을 흘렸다.

 

“이상해. 오랜만 같아. 엊그제 봤는데.”

“후후, 그렇군.”

 

취하면 웃는 타입인 건가. 새로운 정보를 뇌 속에 입력하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모니터에 떠오른 문자열은 잠시 뒤로 하고 의자를 돌려 창문을 마주 보았다. 이제 보니 밤하늘에 상현달이 떠 있었다.

 

“타키온, 밥은?”

“먹었네. 자네가 트레이너실에 남겨둔 것.”

“맛있었어?”

“먹을 만했네.”

“으응. 별로였구나. 지금 어디야?”

“연구실이지.”

“그렇구나. 음. 어? 통금 아직?”

“얼마 안 남긴 했네. 아직 마무리가 안 되었다만 슬슬 정리하도록 할까.”

"응. 착하다아."

 

웃음을 참으려 입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릴 때도 못 들어본 칭찬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그 아카네 군이 뇌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말하는 것이 제법 재미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떤 질문에도 순순히 답해줄 것 같다. 좋아, 무엇을 물어볼까. 즐거워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틈을 타 상대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전화를 왜 했지?”

“전화한 건 자네가 아니라… 흠, 아니지. 글쎄. 왜일 것 같나? 생각해 보게.”

“음… 보고 싶어서?”

 

졸린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수화기 너머, 몇 km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입가에 있던 손은 점차 올라가 눈을 덮었다. 혀가 달싹거리다가 무의미하게 너를 불렀다.

 

“…아카네 군.”

“응…”

“아카네.”

“…으응?”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부르면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참 너다웠다. 무엇을 물어볼까, 골똘히 궁리한 게 허무할 정도로 아주 사소한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일 몇 시쯤에 돌아오지?”

“어… 아마도…”

 

기어가는 목소리로도 너는 충실히 대답했다. 이내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나고, 주변에서 연신 네 이름을 불러댔다.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동으로 의자가 두어 번 회전했다. 펼쳐두었던 논문과 자료 창을 하나하나 지우고 노트북을 종료하자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을 한 나 자신이 퍽 낯설었다.


 

지쳤다. 처진 어깨를 타고 가방이 미끄러져 바닥에 쿵 떨어졌다. 뭘 이렇게 많이 넣어준 건지. 신발만 벗고 현관에 걸터앉아 가방을 열었다. 나는 내 가방에 이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녹차, 와사비, 소금, 기념품용 쿠키…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평소 신세 지는 사람들에게 드리라며 부모님께서 꾸역꾸역 넣어주셨다. 앞으로도 오래 일하려면 주변 사람을 잘 챙겨야 한다나, 뭐라나. 바로 정리할 힘이 안 나 쭉 늘어놓고 팔짱 끼고 바라보았다. 이걸 그냥 이대로 드릴 수도 없으니 쇼핑백이라도 사서 담고, 드리러 다닐 걸 생각하면… 심지어 대부분 식품류라 미룰 수도 없다. 이마를 짚다가 피식 웃음이 샜다. 집을 나오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야 내가 트레이너로서 있어도 된다고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러셨듯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신기하게도 그 말이 예전과는 다르게 들린다. 가업이나 이으라는 게 아니라, 집이니까 말 그대로 편히 오라고. 지치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역시 다녀오길 잘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쌓여있던 하소연도 실컷 했고. 덕분에 숙취로 속은 좀 쓰렸지만 나름 괜찮은 대가였다. 이쪽에 있는 지인들은 다 동종업계라 언제, 어떻게 당사자 귀에 들어갈지 몰라 뒷담화 같은 건 꿈도 못 꾸니 원.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니 더 삽질할 것도 없다. 얼마 전에 타키온 실험으로 한 트레이너가 못 볼 꼴도 당했으니 이젠 저번과 같이 불미스러운 일은 없겠지.

 

마음 편히 굳은 어깨를 휘휘 돌리다가 문득 창문에 눈길이 갔다. 며칠 사람 없었다고 묘하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환기부터 할까. 내려둔 가방을 슬쩍 발로 밀어두고 창가로 갔다.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였다.

 

“여어, 아카네 군! 슬슬 도착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만 타이밍이 좋았군.”

“타, 타키…!!!”

 

합. 비명이 터져 나오기 전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도 트레이너 기숙사에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은 금물. 당연히 담당 우마무스메도 포함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내 담당 우마무스메께서는 오늘도 당당하게 창을 넘어 들어오셨다. 어벙하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날 두고 타키온은 위아래로 나를 살폈다.

 

“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안색이나 표정이 꽤 좋아졌군, 그래. 의외로 그 재정비란 것을 제대로 한 모양이야. 흐음, 숙취라고 하는 것도 딱히 없는 것 같고.”

“그야 숙취해소제도 먹고 식사도 제대로 했으니까… 그보다 왜 왔어? 지금 실험은 좀 곤란한데.”

“실험은 안 하네. 체내에 알코올이 남아있는 모르모트에게 실험할 것도 없네.”

 

손을 휘적거리며 타키온은 태연하게 내 방을 가로질러 식탁까지 갔다. 의자를 끌어 거기에 척 앉더니 아예 다리까지 꼬았다.

 

“아카네 군.”

“응.”

“배고프네.”

“…응?”

“빨리 밥을 차리게나.”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황망히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타키온이 앉아 있는 의자를 붙들었다.

 

“가, 갑자기? 겨우 그거 때문에 온 거야?”

“갑자기라니.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지 않나? 어차피 자네도 식사는 해야 할 거고.”

“아니, 그 말에 틀린 건 없지만 내가 지적하는 게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나 대충 먹으려고 했는데…”

“대충도 상관없네. 난 지금 배가 고프니까. 자. 빠~알~리, 빠~알~리!”

“으윽! 알겠어! 그렇게 보채지 말고 좀 기다려 봐!”

 

타키온과 2년 넘게 함께 하며 알게 된 건 타키온이 먹을 것을 보챌 땐 그냥 빨리 줘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짐 정리는 우선 미뤄두고 냉장고부터 열었다. 오늘 장을 보려고 했던 터라 재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 있는 거라도 대충 긁어모으고 도마와 칼을 꺼냈다. 뒤에서 느긋하게 콧노래나 부르는 게 얄미웠다.

 

당장 만들라고 하니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있는 것을 다 썰고, 즉석밥을 넣어 볶고, 케첩 같은 양념을 버무리고. 그릇 위에서 밥 모양을 잡으며 타키온의 눈치를 살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 불안하게 하는 것도 재능이다. 한숨과 함께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자 살짝 묵은 먼지 냄새를 고소한 향이 밀어낸다. 계란을 적당량 붓고 젓가락을 대려던 차에 타키온이 언제 다가왔는지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대충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손님은 손님인데 어떻게 그래. 뭐어, 있는 거 적당히 볶은 거니 대충이긴 해. 오늘은 피드백도 안 받을 거야.”

 

대화는 받아주면서도 시선은 프라이팬에 고정, 살살 움직이며 젓가락으로 계란을 돌렸다. 얘기하는 사이 꽤 익어버렸는지 회오리가 되려다가 쭉 찢어져 버려서 어쩔 수 없이 내 그릇에 올렸다. 다 됐으면 얼른 달라며 칭얼거리는 타키온을 슬쩍 밀어내며 다시 심기일전. 살살 돌린 끝에 이번엔 그래도 볼만하게 되었다. 그대로 남은 그릇에 올리고, 잘 된 오므라이스를 타키온의 손 위에도 올려주었다. 답지 않게 타키온은 그걸 멀뚱히 바라보았다.

 

“따뜻하군.”

“그렇지? 방금 막 해서 맛도 괜찮을 거야. 도시락은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앉으라며 식탁 의자를 빼주니 별말 없이 총총 걸어와 앉는다. 왜 갑자기 얌전해졌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게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몫과 소스를 챙겨 식탁에 마주 앉으며 표정을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밥 한 숟갈 먹고는 기분 좋게 웃기까지 한다. 뭐지. 진짜 배고플 뿐이었나.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흐뭇하게 보고 있으려니 눈이 딱 마주쳤다. 기분 탓인지 타키온의 미소가 더 깊게 팼다.

 

“아카네 군.”

“응?”

“보고 싶던 이를 실제로 봤는데 얼마나 좋은가?”

“콜록!”

 

내 침에 사레가 걸려 기침이 터졌다. 눈물이 찔끔 나고 삽시간에 얼굴 온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냉수를 들이켜 속을 식히고는 주먹으로 작게 식탁을 내리쳤다.

 

“술 취한 사람이 한 말 가지고 놀리지 마!”

“호오, 말하는 걸 보니 취했을 때 기억은 있나 보군. 아무튼 대답해 보게. 좋은가, 싫은가?”

“놀리는 건 싫어!”

“놀리는 건? 다른 건 좋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는가?”

“아, 제발! 타키온!”

“아하하! 아, 이럴 때 심박수를 체크해야 했는데 서둘러 오느라 장치를 두고 왔군. 내가 이런 실수를.”

“정말 다행이다, 안 가져와서!”

 

더는 대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입에 밥을 마구 밀어 넣었다. 이 와중에 볶음밥이 고슬고슬한 게 맛있었다. 배고픈 줄 알았더니 타키온은 먹다 말고 숟가락도 내려놓은 채 턱을 괴고선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이 내 눈, 뺨, 턱을 차례차례 훑고 지나간다. 체할 것 같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못 참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타키온이 낮게 웃었다.

 

“취했을 때 자네는 고분고분 대답해서 좋았는데 아쉽군. 나중에 자네가 술 마시는 것 좀 보여주겠나?”

“안돼! 담당 우마무스메 앞에서 술 마시는 트레이너가 어디 있어!”

“흐음. 하긴 술이랑 학생이 같이 있는 거니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겠군. 그렇다면 내가 술을 마셔도 괜찮은 시기가 되어서야 볼 수 있나. 이런, 이런. 번거롭군.”

 

타키온이 술을 마셔도 괜찮은 시기. 번뜩 든 생각에 고개가 빳빳해졌다. 붉은 눈빛을 한 번 받고는 천천히 그를 살폈다. 항상 같이 있어서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함께하는 시간 동안 타키온도 많이 바뀌었다. 약간 차분해진 외관이라든가, 분위기, 언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체가. 실험과 트레이닝으로 쉼 없이 쌓아온 만큼 처음엔 얇아 보이기만 했던 몸도 나름 탄탄해졌다. 처음. 그때가 타키온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였는데 어느새 3년 차다. 그러니 타키온의 나이도 벌써. 갑작스레 세월이 체감되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렇구나. 얼마 안 남았구나. 타키온이 어른이 되는 때가.

 

“그때가 오면 내가 한잔 사줘도 돼?”

 

취한 듯이 속내가 입 밖으로 나왔다. 당황한 티가 나지 않도록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술이 싫으면 안 마셔도 괜찮으니까 옆에서 상대는 해줘.”

“흐음. 술이라는 것 자체가 내키진 않는다만. 단 것도 있다고 들었고, 자네가 주는 것이라면 괜찮겠지. 마음대로 하게.”

“단 술에 상대가 너라… 도무지 취할 것 같지 않은 조합이네.”

“뭐라고? 그럼 기껏 상대해 주는 의미가 없지 않나!”

“애초에 그걸 왜 보고 싶어 하는 거야! 난 취한 건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그럴수록 내 호기심이 자극된다는 걸 모르겠는가? 그럼 나중에 도수 높은 술 선물해 주도록 하지! 자네는 내가 주는 건 마셔주니까!”

“선물 예고가 무슨 협박처럼 들리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시덥지 않다 못 해 유치하기도 한 대화를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계란지단을 덮어서 그럴까. 밥은 생각보다도 오래 따뜻하게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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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9,364자

 


 

1월 1일. 새해의 첫날. 이런 뜻깊은 날에 트레센 학원 운동장에서 스톱워치를 손에 쥐었다. 날이 날인 만큼 참배를 다녀온 후에는 좀 쉬며 트레이닝 계획을 다시 볼 계획이었으나, 참 기분 좋게 뒤집어졌다. 참배 중에 나타난 타키온 때문에. 눈 내리는 운동장을 호쾌하게 가로지르는 타키온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옛날에는 타키온이 먼저 트레이닝 하러 가자고 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후우. 깊이 내쉬는 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날아간다.

 

누군가가 들으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타키온은 이제야 출발점에 섰다.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몸을 사린 이전까지와 달리 지금은 플랜A도 성공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이젠 정말로 한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일만 남은 거다. 참 길게 돌아온 만큼 전력으로 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상당히 가파르긴 하지만, 올해는 중거리 G1과 그랑프리 제패를 노리는 로테이션을 짰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계획. 타키온 본인도 동의했고 그의 상태나 자질도 더없이 출중하다. 문제는…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타키온이 골인 지점으로 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스톱워치를 눌렀다.

 

"후우. 트레이너 군. 이번 기록은 어떻지?"

"응, 오차 범위 안이긴 하지만 방금 전 기록보다도 단축되었어. 오늘 하루 기록 추이를 생각해 보면 단순 우연은 아니겠지. 음, 무척 좋은걸."

"후후, 당연하지. 자, 다음 메뉴를 말해보게."

"날도 춥기도 하니 실내 피트니스 센터로 이동하자. 클래식 때 쌓아온 실적 때문에 앞으로 엄청 마크 당할 테니까. 마군에서도 뻗어 나올 수 있는 파워가 좀 더 있으면 좋겠어."

"좋지. 그럼 이동할까."

"그래."

 

스톱워치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니 마치 기다린 것처럼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울었다. 배턴터치처럼 그것을 꺼내 드니 상태 바에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제가 이전에 말한 거 생각해 봤나요?]

 

와작. 갈무리할 틈도 없이 얼굴이 구겨진다.

 

"왜 그러지?"

"아, 미안. 잠깐 연락이 와서. 먼저 가 있어. 짐 챙겨서 따라갈게."

 

여상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타키온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앞장서 걸어갔다. 얇게 깔린 눈에 그녀의 발자국이 흐릿하게 새겨졌다. 한 열 발짝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가뜩이나 타키온의 트레이닝 메뉴와 앞으로의 목표로 머리가 아픈데, 애먼 데에서도 날 찌르고 있다.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의에서 벗어나진 않되 사실상 거절인 답장을 보내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처박았다. 대충 짐을 싸서 양손을 꽉 잡자 나도 모르게 힘을 줬는지 손톱이 손 안쪽을 파고들었다.

 

묵직하다. 비단 짐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타키온은 순조롭다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본래 지닌 재능에 진심으로 트레이닝에 임하며 불씨를 지피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해 가는 타키온을 보며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경기에서 활약하겠어. 약속하지. 네 소원은 이미 성취된 거나 다름없어.」

 

타키온은 그렇게 선언했다. 그게 허세 같은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새삼스레 타키온의 재능을 체감할수록 내 부족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게 문제다. 트윙클 시리즈는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의 이인삼각. 타키온이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만큼 나 또한 그 속도에 맞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요새 그 사실이 벅차기만 하다. 이 또한 당연하다. 그동안의 나는 트레이너이기 보다는 모르모트에 가까웠으니까. 주니어급과 클래식급 메뉴를 거의 건너뛰다시피 하고, 이제 와서 시니어급을 붙잡고 가려니 자꾸만 헛도는 것 같다. 나는 정말 타키온에게 걸맞은 트레이너가 맞을까. 그 초조함이 타인에게도 보일 정도로. 아, 정말 싫다. 이런 내가. 거의 나 자신을 때리다시피 어깨에 짐을 올리고 허리를 들었다. 타키온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타키온. 조심해서 들어가."

 

짐을 어깨에 올리고 아카네가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시선은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릎은 반대로 학교 건물을 향한 것을 보고 타키온이 눈썹을 움찔했다.

 

"자네는 또 트레이너실로 가나?"

"응, 할 게 있어서."

"새해 첫날부터 계속 바로 퇴근하지 않고 트레이너실에 있는 것 같다만."

"연초라 그런지 일이 많아서 말이야. 기숙사까지 못 데려다주는 건 미안."

"그건 됐네. 자네가 멋대로 해주던 거였으니."

 

타키온은 대충 휘젓던 손을 턱 아래에 갖다 대었다. 해가 바뀌었어도 계절은 여전히 겨울. 아직 해가 짧기에 이제야 기숙사 저녁 식사가 시작될 시간에 학교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타키온에게 있어 어둠은 그저 당연한 시간의 형상에 불과했다. 괴한 정도 가볍게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고, 귀신은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반기는 바다. 그런 그를 통금이 아니어도 어두울 땐 걱정된다며 굳이 데려다주던 게 자신의 트레이너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신을 먼저 보내고 트레이너실에 박힌다니. 하나둘 조명이 켜지자 자연스레 아카네의 얼굴에도 음영이 졌다. 그 그늘로도 차마 숨겨지지 않을 짙은 색을 보며 타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카네 군. 내일 트레이닝은 쉬는 날이었지?"

"응? 응. 맞긴 한데 왜? 피로가 많이 쌓였어? 아니면 혹시 어디 몸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럼 내일 오전 9시까지 역 앞에서 보도록 하지."

"어?"

"그러면 적당히 하고 들어가게."

"잠깐! 그대로 가지 말고 왜 나오라는 건지는 말해줘!"


 

"…또 무슨 짐 옮기라는 건 줄 알고 기껏 바이크도 끌고 왔는데."

"음? 짐이라면 아마 생길 걸세. 쇼핑하러 가는 것이니."

"쇼핑 가는 거였냐고! 미리 말 안 해줬잖아!"

 

평소대로 빽 지르려던 목소리가 삑사리를 내며 갈라졌다. 아카네 민망스레 목을 매만지며 헛기침할 수록 타키온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하얀 손이 그 뺨에 닿고, 엄지손가락이 거뭇한 눈 밑을 쓸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손길에 아카네가 표정을 꾸며낼 틈도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소리가 잠겼고, 눈빛도 흐려. 이런, 이런. 어제 내가 적당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무리한 적이 몇 번 있긴 하다만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군. 요즘 잠은 제대로 자는 건가? 졸음운전 한 건 아니겠지?"

"자, 잤어.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보험으로 운전 전에 에너지 음료도 마셨으니 괜찮아."

 

꿈에서 깨어나듯 아카네가 눈을 깜박이며 타키온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목소리가 찢어진 것보다 제 볼이 뜨거운 것이 더 부끄러웠다. 쇼핑센터 쪽으로 몸을 틀어버리며 아카네는 아까보다 조심히 목소리를 꺼냈다.

 

"그보다 웬일이야? 너 보통 필요한 건 인터넷으로 사잖아."

"옷이나 생필품 등에 한정하면 말이지.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구색만 갖추되니 굳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어. 하지만 신발이나 편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레이스에서 어떤 것을 착용하느냐에 따라 기록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공연한 사실. 이미 착용감과 레이스의 결과도 확인된 모델이 있긴 하지만 육체와 마찬가지로 상품도 새로이 변화해 가니 기존 것에 만족해선 안 되겠지. 특히 올해는 더더욱. 이에 연초에 미리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서 새로운 모델을 들이고자 하네. 그런 만큼 나 혼자보다는 자네의 시선으로도 보는 게 좋지."

"그런 거면 미리 말해주지. 좀 알아보고 왔을 텐데."

"무얼. 사전 지식이라면 서로 충분히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오늘은 관찰과 체험 위주로 같이 알아보자고 부른 것이니 부담 가질 것도 없네."

"그래도."

"이런, 이런.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닐세. 말하는 걸 잊었을 뿐이지. 그러니 표정 풀게. 가지."

 

아카네는 자신의 옷소매를 잡아끄는 타키온을 졸졸 쫓았다. 그 뒤에서 몰래 아카네는 타키온이 했던 것처럼 제 뺨에 손을 대었다. 나 지금 타키온이 언급할 정도의 표정이었나. 손바닥 아래에서 볼 근육이 어색하게 움찔거렸다.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웃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접대의 기본은 미소라며 어릴 때부터 누누이 익혀왔으니. 아까는 실수라고 쳐도 지금은 제대로 웃고 있나? 불안감을 밀어내듯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손을 떼니 이미 눈앞에는 운동화와 편자가 가득했다. 생각에 깊이 빠져서인지, 피곤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인지 아카네는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이끌어주던 손이 없었더라면 어딘가에 머리를 박았겠단 생각이나 들었다. 타키온은 가게에 도착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아카네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다정함에 아카네는 손을 맞잡고 싶은 충동을 제 주먹을 꽉 쥐어 참았다.

 

운동화 재질, 스포츠 공학에 의한 설계, 인터뷰 등에 따른 우마무스메의 후기, 타 트레이너의 조언, 마지막으로 실제 착용감까지. 타키온의 말대로 둘 다 사전 지식은 충분했다. 뻑뻑한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끄집어내는 게 어려웠을 뿐. 타키온이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때마다 아카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고 긴 토의가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빈 손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데이터는 충분히 얻었고 구매는 가격, 배송 등에서 인터넷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보고, 들고, 신고. 그러고선 그대로 나가는 것이 눈치가 보였지만 사장은 친절히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눈빛에 호감이 살짝 어린 것에서 아카네는 단순 겉치레가 아니라 팬심으로 말했음을 알아차렸다. 비단 이 사람뿐만이 아니다. 잘 보니 주변의 시선들이 이쪽으로 몰려있다. 피곤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소곤거리는 대화에는 간간히 타키온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사적인 시간이라 차마 말걸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흔한 팬서비스나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가는 타키온을 보며 아카네는 새삼 그의 인기를 체감했다. 트레이너로서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최근 있었던 일 때문에 입안이 썼다. 이대로 있다간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아카네는 서둘러 타키온의 옆에 바짝 섰다. 반짝거리는 형광이 그의 눈을 찔렀다.

 

"어, 여기."

"왜 그러지?"

"아, 별거 아냐. 예전에 여기 게임센터에서 너랑 인형 뽑기 했던 게 생각나서. 정확히는 나만 하긴 했지만… 그땐 이제 막 교복 입은 네 인형이 추가된 참이었는데 지금은 종류가 많이 늘어났네."

"아아. 자네가 내 인형 뽑겠다고 난리를 쳤던."

"네가 약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같이 해줄래?!"

"하하! 그건 자주 있던 일인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모처럼 같이 방문한 거니 또 해보는 건 어떤가? 이번엔 약은 없긴 하다만 비교군으로 쓸 수 있을 테니 괜찮겠어."

"그럴까, 온 김에."

 

딸칵 지갑이 경쾌하게 열리며 아카네가 한쪽에 동전을 쌓아두었다. 비교군으로 쓴다 하였으니 그때와 똑같은 횟수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첫 번째 동전이 달그락거리며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왼손으로 스틱을 움직이고,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른다. 일련의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타키온은 기계 옆에 기대 아카네를 가만히 관찰했다.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자신과 꼭 닮은 인형 하나 뽑겠다고 빛나는 눈을 보는 건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이걸 빛난다고 해선 안 되겠군. 인형 뽑기 창 너머에선 아카네는 인상을 쓴 채 눈을 연신 깜박거리고 있었다. 집게와 인형 사이 초점도 잡지 못한 눈동자가 배회한다. 겨우 인형 하나가 집게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동전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동전을 투입하고서도 집게가 엉뚱한 곳을 내리 찍자 아카네가 인형 뽑기에 이마를 박았다.

 

"아카네 군."

 

벌떡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아카네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오늘따라 집중이 안 되네! 하하. 아니면 오랫동안 안 해서 그럴지도. 오늘은 실험 관련으로 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응. 볼일은 끝났으니 기숙사로 돌아가자, 타키온."

 

아카네는 싱긋 웃어버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먼저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타키온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도 안 하고. 그제야 뒤에서 아카네를 바라본 타키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똑바르던 그의 걸음걸이가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자, 도착."

"아카네 군, 잠시."

"응? 왜?"

 

타키온은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손짓했다. 바이크도 제대로 안 세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동을 잠시 끄고 타키온에게 향했다. 순순히 내렸으면서 선바이저를 올리지도 않고 있으니 타키온이 내 헬멧을 손수 벗겨냈다. 엉망으로 눌려있던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붕 떠올랐다.

 

"아카네 군, 바이크는 여기 주차하고 가도록 하게. 외부 차량 주차에 대해선 내가 생활 반장에게 말해두지."

"내 운전이 그렇게 불안했어?

"잘 도착했으니 나쁘진 않았다고 해야겠지. 다만, 뒤에 있는 날 신경 쓰느라 무사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커. 진짜 문제는 이 이후 혼자 운전할 때가 되겠지."

"그래서 두고 가라는 거야?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내 상태가 심하긴 한가보다."

 

한숨을 섞어가며 웃었다. 타키온이 갖고 가버린 헬멧에 한 손을 올리고, 마치 쓰다듬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렸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금방 가기도 하고, 정 졸음운전이 걱정되면 에너지 음료라도 하나 더 먹고 갈게."

"갖고 다니는 건가, 그걸."

"1+1 행사 상품이었거든."

"전부 마시진 말고 3분의 1 정도만 마시게."

"알았어, 알았어."

 

바이크 사이드백에 넣어두었던 에너지 음료를 꺼내고, 캔 마개를 땄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물을 몸속에 흘려보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단순 플라시보 효과인지 즉각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며 깨어난다. 실수로 음료가 입가를 타고 새어나갔는지 엄지손가락에 이물감이 닿았다. 휴지가 어디 있더라. 태평스레 캔에서 입을 뗐다.

 

"어."

 

빨강. 내 머리카락보다 진하고 짙은 액체가 손에 묻어있었다.

 

"아카네 군! 고개 숙이게!"

 

고개가 강제로 꺾였다. 목덜미에 닿은 타키온의 손이 이상하리 만큼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와 타키온 사이에 낀 헬멧에는 붉은 반점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이거 혹시 내 피인가? 머리를 휘젓는 어지러움도, 속이 뒤집히는 울렁거림도 영 내 감각이 아닌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다리 힘이 풀렸다. 몸이 기울어졌다. 헬멧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점멸한다. 타키온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붉은 점이 하얀 어깨에 떨어질 때쯤엔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낯선 천장이다. 웃기게도 이런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맥을 짚고 있는지 왼쪽 손목에서 약한 압박과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내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질문이 날아올 텐데 조용하기만 하니 영 뻘쭘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실험이나 실수가 아니라 순전히 나 스스로 과로하여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이니. 나름 조절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너무 과신했다. 갑자기 끼어든 스케줄 하나 감당 못 할 줄이야. 눈치가 보여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팔로 눈가를 가리니 옆에서 한숨이 떨어졌다.

 

"요 며칠 무리하는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내 불찰이 커."

"…아니. 이건 순전히 내가 자기관리 실패한 거잖아. 걱정 끼쳐서 미안."

"대체 뭘 그렇게 하는 거지? 이것 참. 내 실험으로 바빴을 때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특별히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냐. 정말 평범한 일. 자료 조사나 트레이닝 메뉴 정비, 일반 트레이너 업무 같은 거."

"그건 이전에도 해오던 거 아닌가. 그런 걸로 이 지경이 된다고?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테지."

"정말 저게 다야."

"아카네 군. 바른대로 고하게."

 

타키온이 억지로 내 팔을 잡아치우니 곧장 붉은 시선이 나에게 쏘아졌다. 이마를 찌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문 타키온은 처음 봐서 가슴 한 편이 시큰거렸다.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웃고 싶었으나, 내 몸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눈 밑만 파르르 떨렸다. 결국 항복하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그냥… 내가 조금 초조했나 봐. 그래서 좀 오버해 버렸어."

"대체 무엇이?"

"…타키온."

"말하게."

"최근에 다른 트레이너한테 무슨 컨택 들어오거나 한 거 없지?"

"음?"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였는지 타키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없다만?"

"하… 없으면 다행이긴 한데… 당사자 의사도 확인 안 해보고 그딴 말을 했다, 이거지…"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설명이나 하게."

 

타키온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미적미적 상체만 일으켰다. 시간을 끄는 게 뻔히 보일 텐데도 내 상태 때문인지 의외로 타키온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순순히 말할 때까지 버틸 셈인 거다, 이거. 목이 타서 마른침을 모아 한 번 삼켰다.

 

"작년 말에 어떤 트레이너가 나한테 네 이적 제안을 했었어. "

"무슨."

"자, 끝까지 들어봐. 일단 그 제안 고민하느라 이렇게 된 건 아니야. 거절은 했어. 당연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난 널 이적 시킬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만약에 네가 네 발로 이적하겠다고 나서도 한 번은 붙들어 볼 거야, 나는."

"흐음? 겨우 한 번만 붙들 건가?"

"그래도 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까… 아, 딴 길로 새게 하지 말고. 아무튼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서 그만."

"그자가 뭐라고 했지?"

"아그네스 타키온은 나 같은 신입 트레이너가 감당할 수 있는 우마무스메가 아니지 않냐고."

 

참 이상하게도 이 말을 하면서 난 웃고 있었다. 아무리 환히 웃어 보아도 말 자체가 부드러워질 리 없음을 알면서도. 내가 내 입으로 독을 깨문 기분이다. 속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감정이 드러나기 전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진 둑으로는 막아지지 않는다. 잇새로, 손 틈으로 연기처럼 본심이 빠져나간다.

 

"젠장. 예전에는 괴짜니까 괜히 어울리지 않는 게 좋다고 다들 제멋대로 떠들며 내버려두더니 이제 와서 탐이 나나 보지? 그렇지만 제일 화나는 건."

 

까드득 이가 갈렸다.

 

"내가 이딴 말을 들을 정도로 트레이너로서 얕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이 말리며 손톱이 얼굴을 긁는다. 한 번 터진 감정은 주제도 모른 채 부글부글 들끓어 오른다.

 

"그동안 언론이나 인터넷 댓글이 그런 말을 해도 애써 신경 안 썼는데, 같은 트레이너한테 그딴 평가를 받으니까 주체가 안 되었나 봐. 너무 분해서 뭐라도 조금이라도 더 하려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거야. 그 평가에 스스로 증명을 해버린 셈이지. 나도 나 자신의 어리숙함에 한숨이 나와."

"자네가 좀 서툴긴 하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딱히 날 달래 달라고 한 말은 아니긴 했다. 내가 못 참고 쏟아내었을 뿐, 타키온에게 뭘 바란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에게마저 이런 평가를 받는 건. 힘이 풀려 손이 턱 떨어지며 내 두 눈에 타키온이 비쳤다.

 

"내가 자네의 첫 번째 우마무스메이니 당연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타키온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붉은 눈동자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어 침침했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착각하지 말게. 그 평가에 대한 증명은 어디까지나 내 레이스로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크큭. 그 평가는 낭설에 지나지 않아. 최근 트레이닝이 순조롭다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렇지만 그건…"

 

전부 네 재능과 실력이 아니냐는 물음은 중간에 잘라 삼켜버렸다. 지금 그런 걸 재확인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릎을 모아 그 위로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바라도 될까, 타키온에게. 새삼 이러고 있는 내가 참 꼴사나웠다. 그래도 이미 이런 꼴인 김에 조금만 더 부끄러운 짓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욕심은 언어로 피어올랐다.

 

"…타키온,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 건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

"그래, 물어보게."

"내 트레이닝 메뉴에 불만은 없어?"

"현재로썬 없네. 있어도 피드백하면 바로 고쳐주고 있지 않나."

"모르모트, 아니. 잘못 말했다. 실험 협력자로서는?"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나 최근 들어 연구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지. 그러나 지금 같은 몸 상태는 곤란해. 물론 이런 상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약도 있지만 그땐 내가 따로 요청할 터이니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안 그래도 그건 반성하고 있어. 그러면 내가 트레이닝 외에 각종 생활을 챙기는 건?"

"만족하고 있네. 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건 정말 좋았는데 없어지니 시간 효율이 떨어지더군. 그건 다시 해줬으면 좋겠어."

"하하. 응, 그건 고려할게. 마지막으로 내가 너에게…"

 

말하던 도중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내 침에 사레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내내 숨겨두던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에 거부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에너지 음료의 카페인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아직도 속이 메스꺼웠다. 서서히 올라오는 토기를 긴 숨을 통해 뱉어내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으니 그 아래에 심장이 쉴 새 없이 뛰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모로보시 아카네가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필요해?"

 

트레이너, 모르모트, 조수 등. 내가 현재 하는 역할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는 많았다. 그 단어들만 나열해서 본다면 그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트레이너는 많고, 모르모트는 항상 타키온이 알아서 찾아다니고 있으며, 그의 두뇌에 조수는 필수적이진 않다. 나, 모로보시 아카네란 존재 자체가 타키온에게 의미가 있는가.

 

"필요하네."

 

타키온은 확언했다. 고민하는 시늉조차 없이. 그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러면 됐어."

 

그에 나도 짧게 대꾸했다. 다른 사람의 평은 필요 없다. 네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벽에 편히 기대었다. 신기하다. 그 어떤 약이나 에너지 음료를 마셨을 때보다 머릿속이 맑게 갠다. 잠을 자듯 색색 숨을 고르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세웠다.

 

"…아니다. 타키온, 하나만 더. 부탁이 있어."

"뭐지?"

"약 좀 만들어 줘."

"오? 자네가 의뢰하는 건 처음이군. 그래, 무얼 원하지? 자양강장제? 집중력 향상? 아니면 며칠 밤을 새워도 무리 없는 육체? 뭐든 말해보게! 그동안 모르모트이자 트레이너로서 한 일들을 치하하며 어떤 것이든 특별히 대가 없이 만들어 주도록 하지."

"아니, 아니. 은근슬쩍 네가 하고 싶은 거 끼워 넣지 말고. 아마 너라면 금방 만들어 낼 거야.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니건만, 장난을 꾀하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벌레 퇴치용이거든."


 

"후우…"

"여어, 카페! 트레이닝을 끝내고 온 건가! 다음 레이스를 앞두고 트레이닝이 연일 이어지고 있던데 혹시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진 않은가? 마침 여기! 카페인을 최대한 배제하여 육체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누적된 피로감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약이!"

"안 마셔요."

"그런가. 뭐어, 이미 2명의 임상실험 결과는 확인했으니 자네에겐 추후 재조정한 것을 부탁하도록 할까."

"그것도 안 마실 거예요…"

 

오늘도 냉정히 거절하며 자신의 공간에 향하려던 카페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설프게 웃으며 무릎에 덮은 담요를 매만졌다.

 

"혹시 그 결과라는 게…"

"하하… 안녕, 카페."

 

나름대로 가렸지만 빛이 담요를 뚫고 나와 살아있는 무드 등이 된 것만 같았다. 심지어 담요 길이가 약간 모자라 발목은 청록색으로 아주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트레이닝도 없는데 이 상태로 다른 데 가기도 그래서… 잠깐 실례하고 있었어."

"괜찮으니 편히 계세요…"

 

누가 봐도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겐 일상이었다. 카페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하며 자신의 소파에 앉았다. 트레이닝이 꽤 힘들었는지 작은 체구가 등받이에 푹 파묻혔다.

 

"최근엔 트레이닝하더니 또다시 연구인가요…"

"당연하지! 실험과 트레이닝의 비율만 바꾸었을 뿐, 나의 연구는 계속되네! 아무래도 주위에선 연구가 끝났다고 오해했던 모양이네만. 하하하! 이토록 연구할 거리가 쌓여있는데 그럴 리가 없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타키온이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몸도, 의자도 회전하는데 붉은 눈은 자꾸만 나에게로 향했다. 마주치는 시선은 나도 즐겁지 않냐고 묻는 것만 같아서 그냥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2명 마셨다는 건…?"

"아아, 시시한 모르모트가 하나 더 있었지."

"카페가 오기 전에 가버렸지만."

 

창밖을 내다보니 나와 똑같이 빛나는 다리가 운동장을 다급하게 가로 질러가고 있었다. 속이 후련해지니 저절로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음, 이번 약 효과가 좋네."

"하하! 친애하는 모르모트 군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니 말이지.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아. 응… 그런 거였구나…"

 

카페는 '친구'와 대화하는지 허공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나에게 향한 카페의 눈빛은 어쩐지 타키온을 볼 때와 닮아 있었다. 역시 들켰구나. 멋쩍게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니 카페는 잠시간 나를 보다가 커피를 내리려 일어났다. 달그락거리며 내려온 머그컵이 2개. 타키온은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아마도 하나는 내 것. 카페의 친절함과 함께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즐기며 빛나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한 두 주일 동안, 타키온의 트레이너가 다리가 빛나는 채로 병원을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건 내가 아니었지만 정정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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