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백업/타키아카

[타키아카]눈 가리고 야옹

라나애* 2024. 9. 5. 16:49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글에는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타키온 육성 스토리 클래식급 주요 스포일러가 직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키온 육성 스토리를 보시지 않은 분께서는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타키온의 가족 설정은 원본마를 기반으로 한 개인적인 날조이니 관련 참고 부탁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7,789자


 

월계배. 현재 가장 기대 받는 우마무스메를 모아서 열리는 시범 경기. 말이 좋아 시범경기이지 그 심볼리 루돌프가 주최하고, 참여 명단이 호화스러운 만큼 G1 레이스 못지않는 주목을 받고 있다. 사츠키상 우마무스메인 타키온에게도 당연하다는 듯 초대장이 왔다. 레이스 참가는 약속할 수 없다. 늘 그렇게 말했던 타키온이기에 거절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승낙. 그 때문인지 최근 타키온은 트레이닝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토록 열중하던 실험과 연구도 뒤에 두고. 이상할 정도로.

조금이라도 더 타키온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혹은 괜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새벽을 꼬박 새워 월계배 참여자의 데이터를 쭉 정리했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출력하기 전에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쟁쟁한 참여자들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피곤한 만큼 뿌듯함이 올라왔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만족하며 스크롤을 쭉 내려 버렸다가 최하단 텅 빈 페이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익숙하디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그네스 타키온. 나의 담당 우마무스메. 이 자료는 타키온에게 보여줄 목적이니 굳이 정리하지 않고자 했다. 그럼에도 자리를 만들어둔 것은 나의 변덕이었다. 아마 그럴 터다. 하지만 타키온의 이름을 볼 때마다 자꾸 카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달리는 방식이 평소랑은 다른 것 같다는 그 말이. 그건 나에게 일종의 기폭제가 되었다. 애써 덮어놓고 모른 척하던 것을 자꾸만 들춰보고 싶게 하는 계기가. 그런 나를 타키온이 매번 막아서서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보았다. 가끔 타키온이 몰래 넘어오던 창문은 벌레 한 마리도 앉지 않은 채 깨끗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트레이너 기숙사 중에서도 불 켜진 곳은 극소수였다. 별마저 뜨지 못한 도시 하늘에서 달 하나만이 기울어진 채 나를 볼 뿐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혹시 내가 놓치는 게 있을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들 하니까. 온갖 명분과 핑계를 혼자 중얼거렸다. 분명 평범한 정보 정리일 뿐인데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손이 떨리는 것과는 별개로 정보 정리는 아주 수월했다. 담당 트레이너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동안의 트레이닝 내용, 뉴스 기사, 개인적으로 적은 일기 등을 비교하며 끊임없이 적어 내리다가 한 칸에서 잠시 속도가 느려졌다.

"가족 관계라…"

조모는 오크스, 모친은 벚꽃상. 타키온의 집안이 레이스 계에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한다는 건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이전부터 자자하게 들어온 얘기였다. 뻔한 내용을 적어 놓은 후, 짐짓 팔짱을 낀 채 공백을 노려보았다. 가족은 가족, 타키온은 타키온이다.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거기다 방임주의로 자랐다고 하였으니 가족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잘 모르는 시대의 이야기이긴 하니까… 이것도 레이스의 역사라면 역사니까 트레이너로서 알아둬서 나쁠 것도 없고…"

어째서인지 변명을 쭉 늘어놓고 있었다. 검지손가락으로는 마우스를 연신 톡톡 건드렸다. 타키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보니 새삼 더 파헤칠 곳이라고는 이쪽밖에 없었다. 마우스 커서가 허공을 배회하다 검색창으로 향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검색어를 바꾸었다. 타키온의 가족 명으로.

거대한 명성치고 인터넷 기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터넷 뉴스가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에 활동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만 담긴 글을 무의미하게 훑다가 뉴스 라이브러리로 이동했다. 당시 종이 신문을 아카이브한 거라 검색에 제대로 걸리지 않아 하나하나 훑어야만 했다. 비효율적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멈출 수가 없었다. 무패로 G1 1착, 연승. 타키온과 비슷한 경주 성적에 조금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뉴스 속 시간은 쑥쑥 지나 모친의 은퇴까지 향해갔다. 오크스 경주 중의 골절, 부상임에도 2착이라는 결과. 무패를 달리던 그녀는 첫 패배마저 화려했다. 많은 팬이 그녀가 곧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였지만 돌아오는 건 은퇴 선언이었다. 여러 신문사가 대서특필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은퇴 사유는 정확히 적혀있지 않았다. 그도 모자라 그 이후 미디어 노출도 강경하게 거부했다. 그런 태도 때문일까. 은퇴에 대한 풍문이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박수칠 때 떠난 것인가, 무패를 이어가던 그녀에게 2착마저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나. 뻔한 레퍼토리들에 하품이 다 나왔다. 인제 그만 봐야 하나 싶을 때쯤 한 주간 저널에서 시선이 딱 멈추었다.

"'정말 단순 골절인가… 그녀가 다리에 숨긴 은퇴 사유'?"

3면 구석에 작게 실린 기사였다. 이런 위치에서도 눈길을 끌어보려고 했던 건지 기사 제목은 꽤 그럴싸했다. 정작 함께 실린 사진은 타키온 모친도 아닌, 어떤 의사의 뒷모습이었다. 짧게 숨을 삼키고 기사를 천천히 확대했다. 눈이 먼저 글자를 접하고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재활 치료가 들어가야 할 시기에 재활치료사가 아닌 새로운 의사가 그녀의 집을 방문한 것을 발견… 해당 의사는 인터뷰를 거절… 다만, 해당 의사의 전공으로 미루어 굴건염 등 다른 건강상 문제가 있을 것으로…"

제대로 된 근거 없이 추측으로 점철된 찌라시. 머리가 내린 평가는 냉철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글자들을 접한 순간 눌러왔던 의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타키온은 본인 스스로도 실험 재료로 치부하며, 망설임 없이 약품을 마실 정도로 실험에 매우 적극적이다. 나나 다른 우마무스메에게도 실험을 권하는 건 어디까지나 검증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런데 유독 본인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하는 검증에서 유난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트레이닝도, 레이스 참가도 마찬가지. 이러한 태도에 대해 타키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다릿심을 소모하는 것보단 관찰하는 것이 더 좋다고. 왜 굳이 '소모'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은퇴를 고려해야 하는 시니어급도 아니고, 한창 성장 중인 주니어-클래식 시기에? 그랬던 타키온이 몇 번의 레이스를 거친 현재에는 왜 실험과 연구를 사실상 중지하고, 본인 몸으로 트레이닝에 임하고 있을까? 그런 타키온의 달리기를 카페는 왜 바뀌었다고 느꼈을까?

그러고 보니 그쯤부터 타키온이 플랜 A니, 플랜 B니 말하지 않았나?

"설마…"

내가 내 말을 끊어내기 위해 옆에 놓아둔 에너지 음료를 술처럼 쭉 들이켰다. 갑자기 다량의 카페인이 들어차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클래식 3관 플랜을 정한 후 뿌렸던 냉각 스프레이, 잠시 (구)과학준비실에서 지냈을 때 본 발 엑스레이 등이 이리저리 시야 사이를 오갔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뛰고, 다리가 달달 떨렸다. 모든 게 단순히 에너지 음료 때문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타키온의 언행을 되짚을수록 떠오른 가설은 점차 뚜렷해져 갔다. 차마 언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 대신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온갖 감정이 내 안에서 휘몰아쳤다. 왜 이런 중요한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이 정도로 내가 미덥지 않은 거냐는 원망. 담당 트레이너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달랐을까 하는 한탄, 그러지 말아 달라는 절규. 그 외에도 내가 아는 어휘로는 표현이 안 될 것들이 뒤섞여 속이 뒤집혔다. 의자에서 뛰쳐나가 변기를 붙잡고 안에 든 것을 쏟아냈다. 딱히 먹은 것이 없어 위액만 식도에서부터 길게 늘어졌다. 입안에 신맛이 감도는 게 무척 기분 나빴다.

얼른 세면대 물을 틀었다. 입을 먼저 헹구고, 물을 받아 연신 얼굴을 닦았다. 고인 물 위로 내 실루엣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위로 타키온의 형상이 겹쳐졌다. 그 타키온은 웃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대답이 돌아올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턱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타키온의 얼굴을 흐트러지고, 다시 내 얼굴이 보였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엉망이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적어도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내 얼굴을 덮었다. 그것이 우습게도 눈이 부셨다. 그래서 웃었다. 입꼬리를 힘차게 끌어올렸다. 마치 누구처럼. 몸에 영 힘이 없는 데도 바닥에 주저앉고 싶지 않아 벽에 기대었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을까. 단순히 추측만 한 나도 이 지경이다.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타키온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째서인지 쉬이 상상이 갔다. 내가 아는 아그네스 타키온은 솔직하지 못하다. 정확히는 본인의 마음조차 잘 몰라 제대로 표현을 못 하는 것에 가깝다. 레이스니, 레코드니 모든 것을 수단화하며 이용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그녀 또한 우마무스메다.

"우마무스메… 그녀들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우마무스메,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구절을 조심히 입에 담았다. 우마무스메 중에서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선 가장 달리기를 사랑하며 몰입하는 게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그래, 어차피 너는 달리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플랜 A니, 플랜 B니 가는 방식만 다를 뿐. 아마도, 너는, 결국. 더 상상하기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고민했다. 일반적인 트레이너라면 보통 이 시점에서 곧장 병원부터 데려갔을 거다. 그 결과에 따라서는 은퇴도 강행할 거고. 부상을 눈앞에서 보는 것보다 부상을 피해버리는 편이 훨씬 더 좋으니까. 그렇지만 언젠가 타키온이 나에게 말했듯이 '보통'의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대는 것은 맞지 않다. 타키온이 가장 우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거다. 은퇴를 '가능성'으로만 남겨놓다가 의사나 트레이너에 의해 강제 확정되어 버리는 순간을.

"이게 무슨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아니고…"

내가 말해놓고 헛웃음이 터졌다. 이 뚜껑을 열지만 않으면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는 우마무스메의 삶도, 죽음도 확정되지 않는다. 양쪽 다 그냥 가능성으로 둔 채, 타키온은 그사이의 줄을 타고 있는 셈이다. 아무래도 최근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지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울며 매달리고 싶다. 정말 그게 최선이냐고, 그게 진짜 네가 바라는 거냐고, 달리는 걸 멈추지 말라고. 체면도, 뭣도 다 집어던진 채 그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싶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것만큼은 싫다. 다 너를 위한 거라고 포장할 순 있겠지. 하지만 난 안다. 솔직히 이건 다 내 욕심이다. 너는 내 꿈이라고, 내 꿈을 감히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꼴이다. 멋대로 내 마음을 타키온에게 밀어붙이는 건 죽어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타키온을 스카우트한 날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때 분명히 타키온에게 말했다. 협력자가 되겠다고. 그렇다면 타키온이 무엇을 선택하든 끝까지 어울려줄 뿐이다. 그 끝에 울든, 웃든. 광대가 되어 네 발을 내 발 위에 올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춤을 춰주마.

"…트레이너 실격이네."

웃던 낯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손끝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미안해. 무의미한 사과가 샜다. 하지만 내가 너를 선택할 때 내어줄 수 있는 건 다 내어줄 각오를 했다. 그렇다면 너 역시 이런 나를 선택한 각오를 해야 했다. 억지라는 건 안다. 알고 있기에 언젠가 돌아올 원망도, 분풀이도 받아들이겠다. 손으로 눈물 자국을 벅벅 닦아냈다. 살이 쓸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후, 자리로 돌아가 현재까지 정리한 자료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소리와 함께 프린터가 여러 우마무스메에 대한 정보를 뱉어냈다. 출력물이 쌓여가는 것을 보며 눈을 연신 비벼댔다.

"아, 출력 설정 잘못했다."

이거까지 뽑을 생각은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나와버린 타키온의 페이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내 손으로 직접 양쪽을 잡아당겼다. 쓰다 말아 하얀색이 가득한 종이는 너무나 손쉽게 찢어졌다. 1/2로, 거기서 1/4로. 그렇게 계속 타키온의 정보는 점점 작아져 형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도시락 만들어야지."

휴지통 위에 손을 탁탁 털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붙여놓은 식단표를 잠깐 확인하고, 주섬주섬 재료를 꺼냈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

오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우선 늘 그랬듯이 타키온이 트레이너실에 찾아와서 함께 식사했을 거다. 식사를 마친 대로 타키온에게 밤새 정리한 자료를 전달하고, 타키온이 그걸 흡족하게 봤다. 그래,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러고 나서.

순간적으로 부끄러운 장면이 떠올라 이마를 짚었다. 타키온에게 도움이 되었단 사실에 기뻐 또 필요한 것은 없다며 온갖 말을 다 해버린 것이다. 감금이든, 약 섭취든 뭐든 다 해주겠다고. 뒤늦게 아차 싶어 멈추니 마주한 건 타키온의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 일 없던 척하려고 했는데 새벽의 영향일까.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 욕심을 강요하기 싫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너무 몰아붙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선 타키온은…

"모로보시 트레이너님! 듣고 계세요?"

"아, 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초록색 모자를 꾹 눌러쓴 타즈나 씨가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트레이너실 소파에 누워있단 걸 뒤늦게 깨닫고 황망하게 일어났다. 이 와중에 자고 일어난 터라 머리가 엉망이다. 묶고 있던 머리를 재빨리 풀어 손으로 연신 빗어 내렸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하아… 그러실 만하죠. 갑자기 아그네스 타키온 씨가 월계배 출전 취소를 하였으니…"

맞다. 생각났다. 타키온은 그 후 잠시 나와 대화하고서는 억지로 나를 재웠다. 지금 몸 상태로는 모르모트도 안 된다면서. 그렇게 지금 자고 일어났더니 학교가 타키온 월계배 출전 취소 소식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이마저도 자고 있던 날 타즈나 씨가 깨우고 알려줘서 알았다. 충격을 받을 새도, 그럴 정신도 없었다. 이제야 슬금슬금 타키온이 또 뭔갈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내가 또 멍하니 있어서인지 타즈나 씨가 손뼉을 한 번 크게 치며 정신을 일깨웠다. 바짝 전신에 힘이 들어가 꼿꼿하게 섰다. 담임 선생님께 불려 나간 학생이 된 기분이다.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아그네스 타키온 씨의 레이스 출전 취소는 트레이너 씨와 상의 후에 발표한 거 맞으시죠? 출전 취소 때도 안 계셨고, 지금 상태도 그러시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아, 네! 물론이죠. 결정 자체는 함께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조금 미련이 남아서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함께 가지 못한 거예요. 아하하… 참 부끄럽네요."

"…트레이너 씨가 일어난 후에 해도 되는 걸 왜 혼자 말한 건가요?"

"관련 상의를 할 때 제가 출전 취소할 거면 최대한 빨리 밝히는 게 낫다고 했거든요. 타키온은 잘 모르겠지만 예정했던 것을 재조정할 시간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편이 좋다고요. 아무래도 제 상태가 안 좋다 보니 혼자서라도 먼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거짓말은 아주 짠 듯이 줄줄 나왔다. 타즈나 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어봤다.

"정말이요?"

"네, 정말로요. "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심증이 어떠하든 당사자가 이렇게 말하니 타즈나 씨도 이 이상 따져 묻긴 어려운지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은 죄송하기도 해서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 타즈나 씨. 해당 출전 취소 건 아직 언론 발표는 안 되었죠?"

"네… 지금은 주최 측에 출전 취소 접수만 들어간 상태예요."

"언론 쪽은 기자회견 없이 학교 측 기사 배포로 부탁드릴게요. 관련 내용은 제가 오늘 중으로 작성하여 전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요?"

"당분간 아그네스 타키온 쪽으로 오는 취재 요청은 전부 거절해 주세요."

"네? 전부요?"

"네. 전부."

타즈나씨는 일순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연신 뻐끔거렸다. 이 사달을 내놓고 뻔뻔스럽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힘차게 허리를 숙였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타키온 출전 취소와 상관없이 월계배 관련 업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업무 몰아주셔도 되니까요!"

"자, 잠시만요. 모로보시 트레이너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무래도 전부는…"

"아, 그리고 죄송하지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위에 덮여있던 백의를 챙기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뒤에서 타즈나씨가 비명을 지르듯 나를 불렀지만, 의외로 잡으러 오시진 않으셨다. 아마도 아셨겠지. 내가 거짓말한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릴 수 없었기에.

"타키온… 타키온!"

타키온이 레이스를 멋대로 취소했다. 보통이라면 기겁하고도 남을 그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거지? 너만의 방식으로. 들뜬 마음으로 복도를 달렸다. 창을 타고 쨍한 초여름 햇빛이 내 앞길을 비추어 주었다.

*

"오. 잘 잤나, 아카네 군!"

(구)과학준비실 문을 열자마자 타키온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냐는 말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한쪽에 앉아 있던 카페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곧장 타키온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들고 있던 백의는 타키온이 앉아 있는 의자에 걸쳐 주었다.

"…한 건 했더라, 타키온."

"이미 알고 있었나? 설명할 시간을 아꼈군."

이전처럼 히죽 웃으면서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꽂혀있다. 흘끔 훔쳐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과 그래프로 가득하다. 어느 창 아래에 언뜻 보이는 엑스레이 사진을 애써 무시하고 타키온의 옆에 섰다.

"오늘 트레이닝은?"

"보다시피 지금 연구로 바빠서 말이지."

"이 흐름이라면 당분간 또 트레이닝 정지겠구나… 일단 알겠어."

"하하하! 잘 알고 있군! 그동안 몸 상태나 회복시키도록 하게. 어느 정도 분석이 끝나면 자네 차례니까! 아, 그래. 일단 거기 있는 것부터 한 병 먹게나."

"네에, 네에. 이건 뭔데?"

"뭐,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자양강장제라네."

자양강장제라… 가느다란 플라스크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절반 조금 넘게 갈색 액체가 채워져 있었다. 탄산이라도 들어있는지 안에서 연신 기포가 터져 나갔다. 안 마시는 선택지는 애당초 없다는 걸 알기에 단숨에 들이켰다. 따끔거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목을 한 번 매만지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일단 발광하는 곳도 없고, 머리색도 그대로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질문을 던지듯 타키온을 살펴봐도 여전히 내 쪽은 보고 있지 않다. 구태여 내 증상을 확인할 정도의 약은 아니었던 거다. 여전히 걱정해 주는 법이 서투르다. 남몰래 웃다가 타키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걱정하고 챙겨주는 건 내 역할이다.

"있지, 타키온.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뭔가? 짧게 해주게."

"당분간 등하교 나랑 같이하지 않을래? 바이크로 태워다 줄 테니까."

"흐음? 그래야 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일어날 트러블의 절반은 내 탓이라며?"

타키온은 한창 바쁘게 움직이다가 딱 멈추었다. 천천히 그 고개가 돌아가고 그제야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누구를 흉내 내며 히죽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책임은 져야지. 이동 시간 절감으로 연구 시간 확보, 학교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을 기자들 회피, 그 외 서포트. 필요하지 않아?"

타키온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날 따라 씩 웃었다. 이내 호쾌한 웃음을 한참 터트리더니 진득하게 내 눈을 쳐다봤다. 달리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걸 못 알아챈 나지만 이건 알 것 같다. 이 눈빛. 순진하며 깊고도 깊은 광기. 타키온이 가능성을 좇을 때의 그 눈빛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찌릿 울린다.

"좋군. 그러면 기숙사 통금 5분 전에 데리러 오도록 하게."

"아무리 바이크여도 여기서 기숙사까지 5분은 무리야! 적어도 교통 법규는 지킬 수 있게 해줘! 아, 맞다. 혹시 오늘 내가 실험해야 하는 건 없지? 온종일 바쁠 것 같아서."

"흐음. 오늘은 없을 것 같다만. 무슨 일 있나?"

"그걸 말이라고… 네 덕분에 무슨 일 아주 많아. 출전 취소 관련 언론 쪽에 넘길 자료 작성하고, 그 후엔 월계배 관련자분들한테 사과하러 다니고, 취소에 따른 업무 뒤처리도…"

"저런…"

뒷말은 뒤에서 나직하게 날아왔다. 뒤돌아보니 카페가 나를 가만히 보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왠지 카페가 날 보는 게 타키온 보는 거랑 비슷해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지그시 가슴을 눌렀다. 이거 잔잔하게 타격이 온다. 잠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어쩌겠는가. 이것도 자업자득인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타키온의 공간을 벗어나 카페의 앞을 가로 질러 호기롭게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를 쭉 들아마시곤 나가기 직전 한 번 뒤돌았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나중에 보자!"

"그래, 수고하게."

"안녕히 가세요."

타키온은 다시 연구에 집중했는지 날 보지도 않고 손만 까딱였다. 됐다. 지금은 그걸로. 타키온이 본인답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나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질끈 다시 묶고 제일 먼저 학생회실 쪽으로 향했다.